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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디지털 제사


  요즘 이런 저런 사정으로 혼자 밥을 먹을 때가 많다.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은 먹는다기보다는 그냥 대충 한 끼 때우는 것이다. 반찬이 없어도 무엇을 사야할지 모르겠고, 슈퍼에 나가기도 귀찮아서 소금이나 간장이라도 있으면 그냥 그걸로 찍어 먹는다. 어제도 혼자 밥을 먹었는데 다행히 몇 주 전에 사놓은 순창 쌀 고추장과 구운 김이 있어서 밥을 데워서는 고추장에 쓱쓱 비벼 김과 함께 먹었다. 반찬은 두 가지 뿐이었지만 고추장 김밥을 먹으니 맛이 참 좋았다.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다음 그 그릇에 옥수수차 끊인 물을 부어서 먹으니 그 물도 숭늉 못지않게 간간하고 구수했다. 아직 입맛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예전에 선친께서는 내가 밥을 잘 먹지 않고 깨작거리고 있으면 “야야, 그냥 장하고 먹어도 맛이 희한하다”고 하시면서 “밥을 한 술 뜨고 장을 떠 넣으면 목구멍에서 간장이 ‘야 이 사람들아 여기 밥 넘어 가는 거 봤나?’ 하고 물어본다.”고 농담을 하셨다. 밥이 하도 맛이 있어서 떠 넣는 즉시 목구멍을 통과해버리니 장이 따라잡기가 바쁘다는 유머였다. 그 유머는 촌스러웠지만 우습기도해서 아버지를 따라서 밥을 떠 넣고 몇 번 씹은 다음 간장을 떠 넣어 우물우물 밥을 씹어 삼키고 물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오늘 강의와 출판일로 서울에 혼자 와 있는데 날짜를 따져보니 선친의 기일이었다. 갑자기 집에 내려갈 수도 없고 내려가도 집식구가 몸이 좋지 않으니 그냥 현재 내가 존재하는 장소에서 물이라도 떠 놓고 지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 혼자 밥을 먹을 때처럼 간장과 밥만을 떠 놓고 제사라고 지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슈퍼에 나가서 귤, 바나나 등 과일 몇 종류와 향, 김, 정종, 삼다수를 사가지고 와서 쌀밥을 구수하게 해서 컴퓨터용 탁자에 차려놓았다. 위패는 종이대신 노트북에다가 큼직하게 디스플레이 했다. 그리고 예전에 아버지가 염원하신 글귀 몇 구절을 같이 띄워놓았다.

  먼저 향을 피우고 반야심경을 읽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스님처럼 우렁차게 독경하지는 못해도 제법 그럴듯하게 독경을 하고는 이어서 아버지가 날마다 외우시던 기도문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읽었다.

"동해설 평생영사

전 세계 인류와 초목금수와 삼라만상의 생명의 붉은 피를 사루아 오는 평생영사일까 하나이다.

여기는 전 세계를 통합할 수 있는 육국 신 라디오방송국 앞인 줄을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산파이다. 천지신명의 진리적인 이치를 세상 사람이 내다볼 수 있는 눈초리 앞에서 과학적으로 꺼내 놓을 수 있는 산파이다.

우리는 오직 주사기어다. 전 세계 인류의 새로운 정신을 폭 뚫어서 깨우쳐 줄 수 있는 주사기어다.

우리는 오직 식모이어다. 전 세계 인류가 먹고 남을 수 있는 밥 솥 뚜껑을 한번 열어 재껴보자.

우리는 오직 전 세계 인류의 자손만대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거름 산더미를 쌓아서 세계만방에다 퍼 흩트려 끼쳐 줄 수가 있는가? 있다.

우리는 오직 전 세계 인류가 활개치며 걸어 나올 앞길의 새아침 첫 발자국을 손결잡고 발맞추어 인도하여 줄 수가 있는가? 있다.

복원, 엎드려 원하건대 원천상제 원시지황 천지 부모님 모신 앞에서........

도란 무엇인가?

저 먼데서 이 가까운 내 앞 첫 발자국이 도일 것이며, 일일행심지도가 도일 것이요, 선 불 유 삼도가 도일 것입니다. 도는 먼저 대인접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곳에서 세상만사를 귀화할 수가 있고 물건을 접하는 곳에서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가 있으니 만약 사람이 이 대도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도를 구한다 하심은 허무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실제를 잃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예전에는 이 문장들이 매우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읽으니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리고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제사를 올리며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한편 내가 혼자 제사를 모셔도 디지털시대이니 이정도면 멋있게 지낸 게 아닌가 자위하며 대전 누이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그랬더니 누이는 “나는 오늘이 아버지 제사인줄도 모르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네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냐. 네 말마따나 참 멋진 제사를 모셨구나.”하고 맞장구를 쳐 주셨다.

  20여분의 긴 통화가 끝나고 밥을 먹었다. 스님이 절에서 발우공양 하듯 아버지의 영혼이 응감하신 밥을 내 앞에 갖다놓고 고추장에 쓱쓱 비벼서 김과 함께 맛있게 먹어치웠다. 그리고 그 밥그릇에 더운 물을 부어서 숟갈로 요리조리 긁어가며 깨끗이 씻어 마셨다. 맛이 참 좋았다. 그러면서 아하 요런 물을 ‘발우차’라고 이름 붙이면 ‘딱’이겠다고 생각했다. 후식으로 바나나 한 개를 뚝 따서 먹었다. 그런데 좀 싱거운 느낌이 들기에 옆에 있는 고추장을 바나나에 찍어서 먹어보았다. 그것도 맛이 괜찮았다. 고추장은 쌀밥의 소스만이 아니라 바나나 소스로도 안성맞춤이었다.

  ‘디지털 제사’, 영혼은 실체가 없고 가상공간에 계신다고 생각하니 선친의 위패를 디지털에 띄워놓고 제사를 모신 것이 잘 한 것 같기는 한데 남들이 안하는 방식으로 ‘벤처제사’를 올렸으니, 조금은 걱정이 된다. “아버지, 요즘 디지털시대인거 알고 계시죠? 저 오늘 노트북 새로 샀습니다. 그 노트북에 예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내용 잘 담아서 간직하겠습니다. 언제든 디지털로 들어오셔서 보시고 수정하실 사항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바로 수정하여 영구보존 하겠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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