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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소설- 탄생설화

나도 소설 한번 써봤어요.  


탄생설화

1935년. 경상도 고령에서 스물여섯의 이유묵은 아내와 일곱 살 먹은 딸 하나를 데리고 무작정 계룡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는 학교엘 다니지 못해 일자무식이었지만 세종대왕님 덕분에 한글은 어느 정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매우 철학적이고 종교적이어서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이라는 큰 꿈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고향에서 머슴살이만 해 가지고는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무모하지만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달랑 불알 두 쪽. 그는 무명옷 몇 가지와 속곳(속 옷), 그리고 감자 수 십 알을 싼 괴나리봇짐을 걸머지고 몇 날 며칠을 걷고 또 걸었다. 밤에는 아무데나 낯선 동네 어귀에서 선잠을 잤다. 부인의 발바닥과 발가락에는 피멍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통을 호소했다.

“정시 아부지, 꼭 이래 가야되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마.”

“그래, 힘들제?, 쪼매만 참제이. 거개 가믄 마 멋지게 살 수 있다카이.”

어린 딸아이는 지치고 지겨워서 노상 울어댔다.

“엄마, 배고파.”

“아부지, 다리아파요. 이잉... 잉 잉 잉 잉”

“그래, 그래, 정시야 쪼매만 참제이, 내일이면 정말 좋은 곳에 갈끼다. 거개 가믄 밥도 주고, 집도 주고, 같이 놀아 줄 동무도 있다 아이가...”

“참말로요?...참말이제?”

“하므, 하므.”

부부는 딸아이를 달래어 걸리다가 업다가 하며 가까스로 계룡산 ‘삼신당’에 도착했다. 삼신당은 서울의 백씨 부자가 지은 이층 벽돌집으로 절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 일종의 토속 종교 사원이었다. 이 경상도 젊은 부부는 아는 사람을 통해 그곳에 가서 일을 하면 철학과 종교를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500리길을 걸어서 닷새 만에 그곳에 당도한 것이다. 삼신당 주인 정 선생은 피로에 지친 남루한 이들 일가족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부부는 며칠간 치친 몸을 쉰 뒤 그곳에서 일도 하고 종교공부와 기도도 하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딸아이도 두 살 연하의 남자아이를 만나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는 데 재미를 붙였다.

이들은 명산에 와서 남편이 원하는 철학과 종교공부를 할 수 있고, 생활도 해결되어 그런대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산중에다 초가집을 지어 가족끼리 살 수 있는 오롯한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또 거의 매년 아들이 태어나 이들의 행복은 가속도가 붙는 듯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나 둘 열병을 앓다가 죽고, 독사에 물려서 죽고... 그것도 아홉명이나... 부부는 큰 딸아이 말고는 낳는 족족 아들을 가슴에 뭍고 울부짖었다. 광복되던 해 딸 하나를 더 낳아 딸은 둘이 되었다. 그러나 부부는 아들 하나 낳기를 간절히 소원하여 천지신명께 빌기 시작했다.

“천지 부모님, 계룡산 산신님, 암용추 용왕님, 제발 아들 하나만 점지하여 주옵소서.”

“천지 부모님, 계룡산 산신님, 암용추 용왕님, 제발 아들 하나만 점지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이다. 산신님께 비나이다. 용왕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7년, 그들의 간절한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진정될 무렵, 1952년 5월, 남편 나이 마흔 여덟, 부인 나이 마흔 둘, 아빠의 이마 주름을 닮은 핏덩이가 엄마의 대문을 열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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