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와 지도책
김치와 지도책은 아무 연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연관이 없는 건 아무것도 없나봅니다. 어제 농업 친구로부터 오늘 오후 3시경 흑석 평촌으로 오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김장김치 1통 준다고요. 너는 매년 친구로부터 김장김치를 얻어먹어 정말 미안했지만, 또 안 갈 수 없습니다. 사실 이번엔 김치는 생각도 안 했습니다. 친구의 부인이 1년 전에 구안와사가 와서 한방 치료를 받는 상황이라, 그리고 지금은 거의 입 모양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해도 심기가 불편할 터라 김장김치 기대는 정말 털끝만큼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다짜고짜 김치를 가지러 오라는 것입니다.
어제저녁 서재에서 1965년 중학교 때 친구가 준 지도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서재 지도책 칸에서 금방 찾았습니다. 보존 상태가 그런대로 양호합니다. 속 표지에 도장이 하나 찍혀 있는데 친구 이름이 아니라 친구 형님 이름이네요. 친구의 형이 보던 교재를 친구가 물려받아 너에게까지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의 형은 60년대부터 평생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지금은 은퇴한 교육자입니다. 너도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친구와 똑 닮았던 것 같아요. 오늘 김치 가지러 가는 길에 그 지도책을 친구에게 가져다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문화재 반환을 수락할 건지 의향을 물어보고 돌려주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갔지요. 네가 보존한 55년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도 좀 들었고요.
오후 3시 15분에 평촌에 도착하여 친구를 만났습니다. 3시경 오라고 한 이유는 친구가 인근 초등학교에 안전요원으로 근무하는데, 오늘은 오후 3시에 근무가 끝나므로 그 시각을 맞춘 것입니다. 친구의 부인도 그 시골집에 있었습니다. 바로 김치통을 차에 싣고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나니, 같이 시내 나가 설렁탕을 먹자고 합니다. 그것도 친구가 사겠다고 다짐을 하네요.
아이참 나, 친구의 제안은 언제나 거절할 수 없습니다. 거절해 보았자 그저 인사치레 같이 되어버려서요. 설렁탕을 맛있게 먹고 돌아오며 김장비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래 김장 재료비로 한 10만 원쯤 송금할까 생각 중인데요, 그 결과가 어떨지 예측할 수 없어 망설여져요. 사실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고, 너 라면 좋아하겠지만, 친구가 너 같은지는 56년 지기라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에 한 번 양념값 조로 10만 원을 봉투에 넣어 건넸다가 거세게 반항하는 바람에 꼬깃꼬깃 구겨진 돈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계좌로 송금하면 그러지는 못하겠지요? 다음엔 친구의 지도책도 꼭 돌려드려야겠습니다. 하하. 2020.11.18.(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