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 망중한
이제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는 잿빛 하늘, 비가 오지 않더라도 외출할 때 우산을 준비해야 하는 장마, 마른장마도 있다지만 장마는 아무래도 비 오는 장마가 제격입니다. 너는 오늘 토요일의 여유를 즐기며 걷기 운동에 나섰습니다. 소지품 가방을 들었는데 하늘을 보니 구름 사이로 해님의 얼굴이 밝아 우산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장마라는 걸 잠시 배려하지 못한 것입니다.
실내화처럼 가벼운 신발을 신고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깁니다. 대전역을 향해 습관적으로 택하는 약 2Km, 하지만 오늘은 열차를 탈 일이 없기에 역이라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대동천에 이르니 천변에서 접시꽃들이 흔들흔들 너를 부릅니다. 천변으로 내려가 꽃에 다가가니, 작년에도 보았던 꽃들이지만 올해는 더욱 새롭습니다. 그들의 모양이 전반적으로는 같지만, 개별적으로는 다 다른 모습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인간과 같은 거죠. 한국인의 모양이 전반적으로는 유사하지만, 개별적으로는 다 다르듯이 말이죠.
여기저기 접시꽃을 감상하며 손전화 카메라를 찰깍찰깍, 징검다리를 건너 또 꽃 옆으로, 꽃 앞으로. 그러기를 한 20여 분, 그런데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쁜 걸음으로 회향하는데, 비가 점점 많이 내리네요. 약 1Km쯤 걸었을 때, 빗물이 너의 피부로 깊숙이 스며듭니다. 마침 편의점이 있어 비닐우산을 샀습니다. 그때부터는 다시 여유롭게 집으로 왔는데요, 비를 맞고 보니 친누이의 소설 『비오는 날의 로멘스』(문현출판, 2016)가 마치 너의 일처럼 느껴지네요. 너도 오늘 접시꽃과의 로맨스를 즐긴 셈인가요? 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일은 길을 가다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누이의 소설에서도 비 오는 날 길을 가다가 일어난 로맨스였죠. 그래서 도(道)는 정말 의미가 깊습니다.
엊그제 안양 큰 수풀 학교에 갔다가 저녁에 아들 집에 가서 하루 묵고 금요일 고속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왔는데요, 열차 좌석에 비치된 코레일 월간지(2020년 6월호)에서 본 그림 한 장이 오늘의 너의 경험과 겹쳐 클로즈업되네요.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선비가 말을 타고 가다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를 듣는 장면입니다. 망중한(忙中閑)의 여유로운 모습, 여기에 비유하여 오늘 너의 길에서 만난 장면은 ‘우행시규화(雨行視葵花), 빗속에 길을 가며 접시꽃을 보다.’로 명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忙中閑의 여유, 우리들의 진솔한 인간적 삶의 모습인가 봅니다. 2020.6.13.(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