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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으능정이 낭만

으능정이 낭만

‘으능정이’는 옛 시골의 지명입니다. 네가 살던 산골 마을에도 ‘으능정이’가 있었는데요, 산등성 모퉁이를 돌아가는 약간 후미진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약간 무섭다, 하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요, 대전에도 으능정이 거리가 있네요. 대전의 으능정이 거리는 아마 근래에 와서 대전시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거리를 조성하면서 새로 붙인 전통이름 같은데요. 그 근거는 그곳이 은행동이라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은행동은 아마 은행나무가 있던 동네 같은데요, 백과사전에서 ‘으능정이’를 검색하니 서울지명사전에 “으능정이: 광진구 광장동에 있던 마을로서 은행나무가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렇게 나오네요. 역시 전국의 여러 곳에 은행나무 마을이 있었고, 그런 곳을 ‘으능정이’라고 했다는 걸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이’는 또 뭘까요. 정자나무의 애칭일까요? 정자나무 모퉁이를 줄인 말일까요?

너는 간혹 공휴일 무료할 때 대전의 으능정이 거리에 나가봅니다.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치는 거리라 젊은 기라도 좀 받을까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기를 빼앗을 생각은 전혀 없고요, 그저 그 활기 넘치는 거리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소일이 되니 그 좋은 소일을 즐기러 가는 겁니다. 매번 그러하듯 오늘도 그 으능정이 거리에 있는 성심당 빵집에 들러 커다란 샌드위치 하나와 산양 바나나 우유를 사서 2층 창가에서 게걸스럽게 먹으며 창밖을 감상했습니다. 그 2층 카페의 이름은 ‘테라스 키친’, ‘지붕 밑 창가 부엌’을 영어로 쓴 것 같은데요. 세계화 시대라 우리들의 간판은 어딜 가나 외래어 일색입니다.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국어학자들은 싫어할 것이고, 그 외 분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수의 옳은 의견도 다수의 밀물을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어도 사회적 산물이라 사회변화에 따라 변해 가는데 이를 극소수의 국어학자들이 막을 방법이 없는 거죠. 헐!

각설하고 너는 구제 가게에 들러 여름 남방(南方) 2개와 막 바지 1개를 샀습니다. 하나에 3천 원, 합이 9천 원이네요. 요즘은 기성복도 마치 맞춘 옷처럼 잘 맞습니다. 은행동에서 중교(中橋)를 건너 중앙 시장 태전마트 입구에 이르니 핸드폰 가게 직원이 액정 필름을 갈아주겠다며 가게로 유인합니다. 깨끗함을 좋아하는 너는 곧 그 가게에서 에어컨을 쪼이며 깨끗한 전화 화면을 기다렸습니다. 그것도 한 10분 걸리네요. 그 교체 대가는 직원 평가를 잘 해주는 것인데요. 너는 평가 내용도 못 본채 평가를 잘했다는 말만 듣고 자리를 떴습니다. 마치 고무신 하나 받고 투표해 준 기분이네요. 더워서 걷기가 불편하여 곧 버스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은행나무가 있던 으능정이, 이제 낭만의 거리가 되었습니다. 옛 지명이지만 새로운 호모데우스가 넘쳐나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깔깔대고 떠들다 헤어지는 그 인류의 거리, 오늘 새삼 으능정이 거리에서 늙고도 젊은 낭만을 즐기며, 내일의 희망을 기약했습니다. 2020.6.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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