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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철학과 문헌학 사이

철학과 문헌학 사이

우리나라에서는 문헌학을 서지학이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서지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지학은 일본의 영향인데 우리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요. 일본 학자들은 일찍이 서양의 bibliography를 '서지'라고 번역했고, 일제 때 식민지 문화 연구를 위해 우리 문헌에 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 그 이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전 중의 고전 논어에 문헌이라는 말이 있어  일제가 신조한 서지보다 좋은 고전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지학을 문헌학으로 고쳐 사용하는 게 바람직할 텐데, 한국 학자들은 그냥 잠자코 있네요. 문헌정보학이라는 학문 명을 사용한지도 오래되었는데 말이죠. 

오늘 새벽 우연한 계기에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문화일보’를 검색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문화일보의 유형이 ‘문헌’으로 나오네요. 다른 신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문화방송'을 검색하니 방송사의 유형은 ‘단체’로 나옵니다. 언론사인데도 신문사는 ‘문헌’, 방송사는 ‘단체’라, 뭔가 일관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신문사든 방송사든 하나의 사회단체, 조직, 법인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문헌은 사회조직이 아니라 내용을 담고 있는 매체이니 신문사의 유형을 문헌이라 한 것은 같은 대상의 분류 동질성이 어긋났네요. 그렇게 분류한다면 방송사의 유형도 문헌이라고 해야 맞죠. 방송 미디어, 멀티미디어도 다 문헌에 속하니까요.

내친김에 영어사전에서 문헌학을 찾아보니 ①philology ②bibliography, 이렇게 나오고, philology는 ①문헌학 ②언어학 ③역사적 언어학, bibliography는 ①서지학 ②저서 목록 ③참고 문헌 일람표라고 나옵니다. 저는 여기서 학문믜 명칭으로 philology가 더 포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역사 언어학을 의미한다는 데서 그 폭과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서지학이 문헌의 목록과 일람을 연구하는 분야라면 문헌학은 문헌에 담긴 내용을 역사 언어학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이니 어찌 보면 서지학은 문헌학의 한 세부 부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어원적으로 philology는 philosophy와 같은 계열에 있습니다. 전자는 logos(언어, 말씀)에 대한 사랑이고, 후자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니 둘 다 학문에 대한 사랑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philology가 bibliography보다 학문에 대한 사랑의 포용범위가 넓은 거죠. 그런데 이 모든 학문에 대한 사랑은 사랑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언제나 우리의 생활 속에 살아 숨 쉬어야 그 가치를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철학이든 문헌학이든 학문을 위한 학문에 머물러 생활인의 지혜, 생활인의 언어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개학연기에 따라 온라인 강의 자료를 학교 홈페이지에 탑재하라는데요, 시스템 적응에 쉽지 않아 우선 이렇게 문헌학으로 시비를 걸었네요. 2020.3.1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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