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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컬럼

자유 사서의 고민

자유 사서의 고민

문명인의 삶에 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즘 디지털 시대, 스마트폰, 인터넷으로 인해 책이 무관심의 종이 묶음으로 전락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소멸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리에 나가면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무너지는 윤리 질서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구시대적 윤리기준을 벗고, 제사도 안 지내고, 21세기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디서건 어김없이 들려오는 쌍욕들, 그래도 간혹 착한 사람들이 보여 마음의 위안을 받습니다.

지금은 인문학이 별로 없고, 따라서 철학도, 삶의 목적도 보이지 않는 선동적이고 무식한 편 가름 사회, 우리는 21세기 카오스에 빠져버렸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해도, 소통과 질서가 무너져도, 복원력을 잃고 계속 속수무책으로 잘난 척만 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무얼 어떻게 하며 살고 있는지요? 네, 참회하고 반성할 뿐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일개 서민이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무턱대고 책을 읽고, 인생을 공부하며, 스스로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자유와 인권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과 내일, 그리고 미래를 위해 조용히 숨을 죽이며 진정한 ‘독립운동’을 준비할 따름입니다.

2020년 3월 1일, 101주년 삼일절이 지나갑니다. 그땐 지금보다 더 어려운 사회였을 것입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그 원인 제공자는 누구였습니까? 당시의 위정자들이었습니다. 독립을 위해 일어난 건 누구였습니까? 책임도 권력도 없는 당시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위정자들이 잘 못해 나라를 잃은 백성들, 그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독립운동뿐이었습니다. 독립군이 국지전을 해보았지만 강력한 제국주의 군대 앞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이겼다고 독립은 오지 않았습니다. 용감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적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죽였지만, 백성들은 그로 인해 오히려 더 핍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시 해방을 맞은 전기는 만세운동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원폭을 맞고 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을 맞았고, 좌우 대립으로 인한 분단의 아픔을 겪으며, 한국전쟁을 치르며 자유민주주의를 지켰습니다.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통치 방법은 잘 정했지만, 실행에는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라는 과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재적 방법으로 기반을 쌓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점진적으로 독재를 극복하며 우여곡절 끝에 지금 21세기에 와 있습니다. 그 과도기에서 우리는 1988 서울올림픽을 치러냈고, 1993 대전 세계 엑스포를 치러냈고, 한강의 기적으로 칭송받는 세계 10위권 경제국을 달성했습니다. 한국의 산업기술은 눈부셔, 세계 산업의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술 연예인들은 세계의 아이돌이 되었고, 개발도상국들은 우리를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다시 추락하는 느낌입니다. 국가적 정신적 지도자가 없습니다. 정신적 원로들이 있어도 그분들의 고언을 듣지 않습니다. 그저 노인네의 헛소리로 치부하는 정치권과 어린 백성들, 우리가 이런 혼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100년 또 힘든 사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난국을 극복하는 데는 다시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인문학, 철학, 기초과학을 바로 세우고, 모든 종교를 인간질서의 바탕 위에 스스로 개혁하고, 기술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고, 그래서 삶의 가치관과 나라 사랑 정신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국민 모두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독서 개발 5개년 계획을 열 번이건 스무 번이건 계속해야 합니다. 그 중심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 도서관은 허황한 ‘공간신앙’의 장소가 아니라 국민의 인문과 과학을 깨우고 개발하는 실체적 ‘인문 신앙’, ‘과학신앙’의 중심이라는 걸 인식했으면 좋겠어요. 작금의 ‘코로나’ 사회를 바라보며 자유 사서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七十而從心所欲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2020.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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