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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컬럼

노벨상과 신 포도

노벨상과 신 포도

우리 한국인이 머리는 세계 최고로 좋다는데 노벨상을 하나도 못 타는 이유는 뭘까? 교육 탓? 정책 탓? 의식 탓? 조상 탓? 이 모든 탓? 노벨 평화상 하나 있다지만 그 상으로 인해 지금 국민이 평화롭지도 못하니 그 상의 효력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스웨덴 한림원은 2019년 10월 10일, 2018, 2019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지난해 미투(Me Too) 논란으로 문학상 대상을 선정하지 못해 이번에 ‘정산’했는데, 그 결과 2018년 문학상은 폴란드의 여류작가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 1962년생 만 57세, 바르샤바대학교 졸업)에게, 2019년 문학상은 오스트리아의 작가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년 출생 만 76세, 오스트리아 그라츠칼프란츠대학교 졸업)에게 돌아갔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주요 작품은 ‘잃어버린 영혼’, ‘태고의 시간들’, 그리고 페터 한트케의 주요 작품은 ‘관객 모독’, ‘나는 상아탑의 주인’, ‘문학은 낭만적이다’ 등이 있다고 한다. 노벨 문학상은 어느 한 작품에 주는 상이 아니라 작가의 업적을 보고 주는 상이다.

노벨 문학상은 1901년 노벨상 시행 이래 2019년까지 총 115명(나무 위키 목록에서 필자가 셈한 결과)이 나왔지만, 이 가운데 한국인은 한 명도 없다는 게 참으로 의아하다. 한국 문인들이 노벨상을 못 타는 이유는 뭘까? 한글이 세계적 언어가 아니라서? 서양어로 번역하기 어려워서? ‘미투’ 때문에? 아니면 다른 문화적 이유? 일본은 언어가 좀 허접해도 문학상이 통산 3명, 중국도 2명이 나왔는데, 우린 하나도 없으니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지난주에 규장각에서 시민 강의를 한 어떤 고전 전문가의 말이 너의 뇌리에 겹쳐온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아무래도 우리 문학은 고전문학이건 현대문학이건 좀 상업화되어 있는 느낌이다. 인문학을 외치면서 인문학을 하지 않는 이율배반적 사고방식? 등단이라는 벽을 쌓아놓고 자기들끼리 무슨 재단 지원금이나 이용하려는 문인들의 의식, 뭐 그런 데 원인의 일단이 있지 않나 의문을 품어본다. 미국의 가수 밥딜런은 등단하지 않았어도 노벨문학상을 탄 바 있다.

노벨상 분야는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이렇게 6개 분야이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학 분야나 과학 분야도 수상자가 없다. 우리는 60년대 이후 비약적인 경제발전, 자타가 공인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며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 진입했다. 그런데 노벨상에서는 문학도, 경제학도, 과학도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경제학 분야만 빼고 전 부분에 걸쳐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엊그제 발표된 2019년 노벨 화학상에도 일본은 이름을 올렸다.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는 10월 9일, 리튬이온 전지 발전에 공헌한 존 B. 구디너프(John B. Goodenough, 미국, 97세, 텍사스대 교수), M. 스탠리 휘팅엄(M. Staney Whittingham, 영국, 78세, 뉴욕주립대 교수)와 일본인 요시노 아키라(吉野彰, 일본 71세, 메이조대 교수 겸 아사히 카세이 연구원)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 발표했다. 이로써 일본의 과학 분야 노벨상은 일본 국적자 22명, 일본 출신의 외국 국적자 2명으로 계 24명, 문학은 일본 국적자 2명, 일본 출신의 외국 국적자 1명, 계 3명, 평화상 1명으로 이를 합하면 총 28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우리가 노벨상을 못 받는 이유로 여러 설명들이 들려온다. 그 내용은 주로 우리가 일본보다 서양문물의 적응이 90년이나 늦었고, 또 우리는 급격한 산업발전의 과정에서 응용기술 개발에 치중하다보니 기초과학이 늦었다고 한다. 또 최근 우리의 산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제품 생산에서 일본을 능가하는 분야도 여럿 있으니 우리가 노벨상을 못 탄다고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식이다. 일본이 노벨상을 받은 분야도 실제 일본의 산업기술 응용면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정황을 보면서 너는 이솝 우화 <여우와 신포도>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우가 너무 높이 달려 있는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따먹지 못하자, 그 포도를 신포도라 치부하며 포기했는데, 우리도 노벨상을 마치 여우의 신포도처럼 미리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노벨상이 실속이 많은 것은 아니라고 자위하며 노벨상을 마치 여우가 포도 대하듯 대하는 것은 아닐까?

신포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우선 대학 입시와 취업에 올인하고 있는 교육정책, 대학정책, 연구지원정책을 인문학문의 회복, 기초과학의 육성, 응용과학기술의 활성화 정책으로 180도 전환하여 이들을 균형있게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연구비를 독식하는 적폐세력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 한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놔도 효과를 볼 수 없을 것이니 우선 국민의식을 개혁하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 자고로 가장 어려운 일이 국민의식개혁이다. 의식은 습관이기에 몇십년 몇백년 습관화된 우리 의식을 개선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번 일본의 노벨 화학상 수상자는 연구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호기심과 통찰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다. 어렸을 때부터 가급적 호기심을 꺽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을 길러주지 못하는 우리의 생활과 교육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정상화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셈이다. 너는 작은 민초 시민이지만 그래도 너를 비롯한 온 국민이 대오 각성해야 하겠다. 그런데 이런 글 썼다고 누가 너를 ‘토착왜구’라고 하지는 않을까? 2019.10.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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