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21(화)
‘고리타분’과 온고지신
사전에서 ‘고리타분’을 검색하니 ‘고리타분하다’가 나온다. 그리고 그 뜻은 <1.(사람이나 그 언행, 성격 따위가)신선함이나 생기가 없이 지루하고 답답하다, 2.(냄새나 공기가)신선하지 못하고 역겹게 고리다>로 나왔다. 또 ‘고리다’는 말은 <1.(사물이나 그 냄새가)썩은 풀이나 썩은 달걀에서 나는 것과 같이 고약하다, 2.(사람이나 그의 언행이)옹졸하고 인색하다>로 나왔다. 그 뜻이 별로 좋지가 않다. 신선하지 못하고 달걀 썩은 것 같은 냄새가 나서 역겨우니, 만일 어떤 사람이 고리거나 고리타분하다면 우리는 그를 싫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오래된 것을 말할 때 고리타분하다는 말을 사용해 왔다. 예를 들면 문헌정보학에서도 고서지학이나 도서관사 등 옛것을 다루는 과목을 고리타분하다고 폄하해 왔다. 이 발달된 현대 과학문명시대에 고서나 고전 등 고리타분한 옛날 것을 배워서 어디에 써먹겠느냐는, 뭐 그런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석사과정에서 서지학을 선택했을 때 어떤 선배 한분이 서지학은 고리타분하다고 내게 귀띔해 주었었다. 사실 그러한 인식은 1990년대부터 고전연구 분야가 취업이나 진로에서 불리해지고, 컴퓨터와 자동화를 다루는 정보기술 과목들이 확대되면서 심화되어왔다. 이는 어찌 보면 인문학이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무시되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학문의 조류는 정신학문과 기술학문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라는 생물은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그 두 부분이 다 건강해야 인류사회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교육당국에서나 대학에서나 실제로 정신분야는 점점 배제하고 기술 및 직업교육에 치중하고 있어 문헌정보학자 내지 인문 학자를 자처하고 있는 이 ‘6학년 5반 어린이’로서는 매우 걱정스럽다. 필자도 고리타분해서 그런 것일까?
이야기를 전개하려면 매우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는 거두절미하고 왜 고전학문을 살려야하는가를, 왜 인문학을 살리고 육성해야 하는가를 몇 마디만 항변하고자 한다. 고전은 정신이다. 인문학은 정신을 똑바로 세우는 학문이다. 역사는 인류정신의 흐름이자 방향이다. 과학기술에도 인류의 정신을 담아내야 한다. 우리는 정신이 나가면 정신 나간 사람이 된다. 도서관은 인류정신의 집적소이며 인류 정신의 발전소이다. 그러기에 도서관은 인문학이라는 정신적 지주를 굳건히 유지하면서 정보기술과 인터넷을 편리한 도구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사서는 인문학을 중심으로 육성해야 한다. 정보기술 쪽을 강조하면 진짜 과학자들에 밀릴 것이고, 인문학자들에게도 밀리게 되어 사서는 설 땅이 없어질 것이다. 정보사회라 아무리 컴퓨터와 인공지능이 발달한다 해도 그 기술은 인간이 이용해야 할 도구일 뿐이며 그 이상 오버하면 인류의 존재가치마저 사라질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금도 위험사회라고 하는데, 지금도 지구촌에는 수많은 비인간적 사건 사고가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데 얼마나 더 인류를 위험사회로 몰고 가려 하는가?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위대한 과학자들도 이점을 염려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고리타분하다’는 말을 ‘故 理 打 分’이라는 漢字로 바꿔 쓰고 싶다. 옛 사람들이 생각한 이치와 그 이유를 연구하여 인류의 분쟁과 분란을 타개하자는 뜻으로 말이다. 인문학의 정신을 대변하는 ‘溫 故 知 新’이 옛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까닭을 잘 살펴 새로운 지혜를 창조하자는 뜻이라고 200여 년 전에 홍제 정조대왕이 설파하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