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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컬럼

군자불기와 불기도서관

 

군자불기君子不器와 불기도서관不器圖書館

겨울방학 때 제주도에 잠시 다녀왔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필자는 어딜 가면 꼭 도서관과 박물관을 들러보는 습성이 있다. 그날 역시 관광은 접어두고 한라도서관과 우당도서관 그리고 국립제주박물관을 탐방했다. 그런데 한라도서관을 견학하고 나오니 버스도 택시도 잡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큰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 나오는데 한 500M쯤 걸었을까, “不器圖書館”이라는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반가워서 그 도서관에 들어가 보았다. 직원이 한명 있었는데 매우 친절했다. 도서관은 작은 규모지만 정리 정돈이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직원에게 불기不器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논어論語에 나오는 군자불기君子不器에서 이름을 얻었노라 했다. 의미가 심장하게 느껴졌다.

不器圖書館이라. 집에 돌아와서 논어論語를 찾아보니 위정편爲政篇 12번째 문장에 “君子不器”라는 말이 있었고 그 뜻은 “군자는 한가지에만 쓰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The accomplished scholar is not a utensil.”는 해석이 나왔다(더 클래식 동양고전컬렉션 <논어> 153쪽 및 성백효 역주 <논어집주> 64쪽). 과연 그렇군! 하고 무릎을 쳤다. 군자君子, 즉 인격과 지식이 잘 갖추어진 사람은 한 가지 그릇(틀)에 머물지 않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소통한다는 뜻이라 생각되었다. 요즘 말로 말하면 통섭을 한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불기도서관은 도서관이라는 기존의 고착화되어 있는 틀에 얽매이지 않아야 좋은 도서관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틀에 얽매여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보다 넓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울타리를 치고 있다. 학자들도 정치인들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포용하고 융합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오래전에 나온 박상균 교수의 <도서관학만 아는 사람은 도서관학도 모른다>의 책 제목처럼 사서들은 도서관학만 배워서는 참 도서관의 실체와 존재 이유를 모르게 될지도 모른다. 도서관이 사회적 존재라면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들은 먼저 그가 속한 사회를 파악하고 그 사회와 소통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도서관 정보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런데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둘러보아도 왠지 필자의 눈에는 사서들이 사회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다.

도서관에는 대체로 2가지 도그마dogma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관료주의 도그마이다. 관료주의는 계급사회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직급이나 직위가 높으면 아무래도 목에 힘이 들어간다. 고객이 사무실에 들어오는데도 그냥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저 뒤에 있는 소위 높은 분들은 고객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거나 아니면 눈이 휘둥그레 가지고 왜 오셨냐고 다짜고짜 이유를 묻는다. 또 하나는 사서라는 직업적 도그마이다. 사서들은 전문직이라고 믿고 있고 실제로도 전문직이어야 하지만 너무 전문성만을 강조하다보면 융통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필자도 사서이지만 사서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어떨 땐 매우 답답함마저 느낄 경우가 있다. 업무개선 제안을 하면 으레 불가능한 쪽으로 이유와 변명을 늘어놓는다.

지난 해 말 <답을 내는 조직>이라는 책이 나왔다. 제목만으로도 귀가 솔깃하여 구입하여 읽어보니 과연 옳은 말들이 많았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말은 “하려고 하면 방법이 보이고, 하지 않으려고 하면 변명이 보인다.”는 문구였다(29쪽). 군자불기君子不器든 불기도서관不器圖書館이든 우리는 하나의 고착된 틀에 매이지 말고 적극적으로 고객과 소통하며 인간적 도서관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서가 없으면 도서관이 아니다”라는 것만큼은 사회를 향해서 행동으로 설득해야 한다. 전국 곳곳에 생겨나고 있는 문고나 작은 도서관들이 도서관의 제 역할을 다하려면 우선 전문 사서를 배치해야 하며, 그 사서들이 君子不器하여 사회와 융합해 돌아갈 때에만 좋은 도서관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월간 라이브러리&리브로 2013년 4월호. 글. 이종권. 문학박사(문헌정보학), 문정작은도서관장, 건국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