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물음을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을 것이다. 필자도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어 글을 쓰려고 대어들었다. 쓰다보면 어렴풋하나마 해답이 좀 나올 것 같은 기대감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표현한 데카르트 역시 스스로의 존재를 고민하다가 이런 ‘궁색한’ 답을 내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생각하는 존재가 존재의 전부는 아니다. 우선 천지 만물이 모두 생각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지구가, 저 소나무가, 저 강아지가 생각을 할까?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존재할까?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자기 존재를 인식할까? 데카르트의 정의는 그래서 인간 존재의 일부분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서 이 세상에 인간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서 자기 존재의 가치를 항상 잘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아전인수(我田引水)로 생각하다가 ‘천동설(天動說)’이라는 오류가 나왔다. 지금도 “해가 뜨고, 해가 진다(The sun rise, The sun set)”고 한다. 의미 있는 이름이라고 지어놓고 좋아하는 ‘해오름’이라는 말도 천동설을 기반으로 하는 표현이어서 진리에는 위반된다. 실제의 현상은 ‘지구돔’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 또는 시각을 달리하여 생각한 결과 도출된 경우가 많았다. 자기중심적 사고로는 진리의 발견도 행복한 생활도 달성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면 진리에 입각하여 우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학자도 자기전공중심이어서는 훌륭한 학자가 되기 어렵다. 종교인도 자기 종교 중심이어서는 종교인의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인간이 인간중심적으로 과학을 발전시키고 살아온 결과 다른 생명들을 훼손하고 있다. 인간이 발 딛고 살아가는 지구도 병들게 하면서 과학이 발달했다고 좋아하고 있다. 사람들은 지금 삶의 본연의 의미와 가치를 모를 뿐 아니라 온 생명과 자연에 해를 입히면서 그것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삶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안에서는 나를 모른다. 내 고장에 집착해서는 내 고장을 모른다. 문호를 개방하고 세계인을 불러들여 우리를 알리되 세계인의 눈으로 우리를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모든 지역의 서비스 기관들은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기 때문에 그 지역주민에게만 서비스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자기중심적, 지역중심적이어서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그 고장을 발전시키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떠나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아야 한다. 인간을 떠나 대 자연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아야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진면목을 파악하고 올바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20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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