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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데퉁맞은 이야기

데퉁맞은 이야기란 ‘거칠고 치밀하지 못하고 미련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데퉁맞은 이야기도 때로는 유익할 경우가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일상의 매너리즘을 깨우쳐 다시 생각하고 바로잡게 하는 효과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런 이야기가 도움이 될라나 해서 몇 가지 데퉁맞은 이야기를 적어본다.    


데퉁맞은 이야기 하나 : “시대와 사회의 주류는 ‘생명시대, 생명사회’이다.”

우리는 시간적으로는 ‘시대’, 공간적으로는 ‘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 원시시대, 고대, 중세, 근세, 현대 등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사회를 이야기할 때 원시사회, 농업사회, 산업사회, 정보사회, 디지털 사회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시대와 사회의 구분은 일견 다른 것 같지만 한데 묶여있다. 시간과 공간은 개념적으로는 분리되지만 실질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할 때 항상 ‘여기 이 공간의 지금 이 시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그 본질적 주류는 ‘생명의 시대’이며 ‘생명의 사회’이다. 고대, 중세, 근세에도 ‘인간의 삶’이었고, 현대, 디지털 시대에도 ‘우리의 삶’인 것이다. 생명시대 그리고 생명사회가 아닌 인간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를 흐르는 모든 시대는 ‘생명사회’라는 것이다.  

데퉁맞은 이야기 둘 : “학문은 세상을 보는 렌즈다.”

학자는 저마다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러나 통합학문은 세상을 멀티렌즈로 본다. 학자들은 먼저 대상을 육안으로 본다. 다음엔 카메라로, 현미경으로, 망원경으로 줌을 밀고 당기면서 다각도로 본다. 다음엔 심안, 혜안으로 본다. 육안, 현미경, 망원경으로는 아무리 봐도 완벽하고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심안과 혜안으로 보면 갈등이 풀리고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심안과 혜안을 개발하는 학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심안과 혜안이 부족한 학자들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반목한다. 학문적인 반목과 갈등보다는 권력욕과 사라사욕에 기인한 세속적 갈등에 빠지기 쉽다. 진정한 학문으로 나아가려면 심안과 혜안을 가진 학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데퉁맞은 이야기 셋 : “모든 학문은 역사로 통한다.”

학문은 인간이 발견하고 창안한 지식과 지혜의 역사이다. 흔히 학문의 시초를 고대 그리스로 잡고 있지만 인도, 중국, 한국 등 동양의 학문도 결코 그리스에 뒤지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학문이 모든 학문의 시조로 등장하는 것은 서양 중심의 교육에서 초래된  편견일 것이다. 근대 동양인들이 서구로 유학을 가서 그들의 학문을 수입했으므로 학자들의 생각이 서양식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편견 없이 잘 들여다보면 문자가 있는 사회에서는 예외 없이 나름의 학문이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학문은 역사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을 공부하는 것은 모든 학문의 기초이다. 역사가 없는 학문은 없겠기에 역사를 기초하여 각 갈래의 학문을 하는 것이 학문의 정도라 하겠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했듯이 “모든 학문은 역사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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