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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서식(棲息)

서식(棲息)

서식이란 사람 아닌 다른 동물에 쓰는 생존 용어입니다. 곤충이나 동물이 살아가는 환경을 서식지라 하니까요. 오늘 아침 빈방에 들어와 화분에 물을 주는데 화분 받침대에 물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그걸 쏟아내기 위해 운반하는 도중, 방바닥에 흘린 물을 걸레로 닦는데, 구석구석에 거미가 서식하고 있네요. 하하. 너는 거미를 잡지 않고 그 주변을 걸레로 닦아냈습니다. 갑자기 “산 입에 거미줄 치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은 관리하는 공간에는 거미가 들어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네 그렇죠. 날마다 쓸고 닦고 관리하면 잡 벌레들이 서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인간도 각처에서 서식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너에게 棲息을 적용해 보았네요. 너는 1950년대 계룡산에 서식하다가, 70년대에 대전에 서식하다가, 80년대 초반에 부산에서 서식하며 자식들을 낳고, 80년대 중반에 서울에 서식하며 대학원에 다니고, 90년대에 남원, 대전, 서울을 전전하며 서식하다 아내를 잃고, 그 후로 아이들과 별거하며 홀로 서식하고 있네요. 하하. 그래도 아직 건강이 살아 있으니 홀로 서식해도 큰 지장은 없습니다. 다만 좀 불편할 뿐.

우리는 언어에서부터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을 차별하고 있습니다. 생명 존중 및 생명의 존엄을 말하면서 그건 마치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죠. 인간보다 먼저 탄생한 소, 개, 돼지에겐 생명을 별로 존중하는 것 같지 않지요? 결국 다 잡아먹어 버리니까요. 그래서 언어도 그렇게 차별어를 쓰나 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는 생명 존중 사상에 반하는 것이지요. 살생을 금하는 불교적 사상이 아니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생명 존중 사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의 언어와 태도를 좀 개선하면 좋겠습니다. 서식(棲息)이라는 말 대신 가치 중립적인 생활(生活)로 말이죠. 그래서 앞서 너의 경우를 생활로 교체하면,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인간도 각처에서 생활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너에게 생활을 적용해 보았네요. 너는 1950년대 계룡산에 생활하다가, 70년대에 대전에 생활하다가, 80년대 초반에 부산에서 생활하며 자식들을 낳고, 80년대 중반에 서울에 생활하며 대학원에 다니고, 90년대에 남원, 대전, 서울을 전전하며 생활하다 아내를 잃고, 그 후로 아이들이 출가해 별거하며 홀로 생활하고 있네요. 하하. 그래도 아직 건강하니 홀로 생활해도 큰 지장은 없습니다. 2020.1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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