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의 대륙에서
2020년 8월 19일 수요일, 한라의 가슴에 안겨 푸른 하늘을 호흡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한라산의 높이는 1,947.269m라고 나오는데요, 사람들은 편의상 1,950m라고 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아들과 나) 오늘 한라산 정상에는 갈 수 없으나 정상의 뒤 암벽을 볼 수 있는 어리목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정상 코스는 왕복 8~9시간이 걸리는 너에게는 매우 힘든 코스라고 아들이 말하기에 왕복 4시간 정도 걸리는 ‘어리목’코스를 택한 것입니다.
일단 아들 차로 출발했습니다. 조천(朝天)에서 어리목까지 가는데도 50분 정도 걸리네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산로 입구로 가니 지하철 출입구도 아닌데 무슨 QR을 찍게 되어 있습니다. 너는 잘 모르겠는데 역시 아들이 해결합니다. 산으로 들어가니 신선한 숲길, 그러나 갈수록 경사가 있네요. 출발할 때는 좋았는데 점점 숨이 차오르고, 아들은 다람쥐처럼 저 멀리 가서 기다리고 있고, 참으로 이런 게 실버 현상인가 보네요. 그래도 쉬엄쉬엄 두어 시간을 오르니 시원한 샘물이 콸콸, 물을 한 표주박 들이키고 또 오르니 시야가 탁 트이는 비스듬한 초원이 나타납니다.
너는 저절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노루가 놀라지 않을 정도로, “와 대단하다. 와, 와”, 이렇게요. 정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어요. 초원엔 조릿대와 이름 모를 풀들이 빼곡히 깔려 있고, 생사가 엇갈린 구상나무가 서로를 응시하는 그야말로 신선 세계의 풍경. 그런데 노루 한 마리, 유유히 풀을 뜯으며 사람을 피하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으려 하니 그제 서야 몰래카메라를 피해 관목 속으로 몸을 감추네요. 하하. 귀여운 노루, 너는 예전 고향의 노루골을 기억합니다. 그곳에 노루가 살아 지명이 노루골이었던 모양인데, 너는 그땐 거기서 노루를 보지 못하고(너의 동네에서는 보았음) 이제 한라산에 와서 노루를 봅니다. “와, 평화의 노루야, 그렇게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아가렴, 자넨 자서전 따위는 남길 생각 말고, 그냥 그렇게 착하게만 살아라.” 하하.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으며, 윗세오름, 백록담 암벽,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고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아들이 오늘 볼 경치는 다 보았으니 힘든데 더 오르지 않아도 되겠다 하여, 만세동산에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백록담은 보지 못했지만, 백록담 절벽의 정상은 보았으니 그래도 만족합니다. 예전에 아버지도 다녀가셨다는 한라산, 오늘 너도 왔으니 어려운 숙제 하나를 해낸듯 감개가 무량합니다. 비록 1,950m 중 1,500m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라에 와서 한라의 정기를 받았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낍니다. 너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아들이 말합니다. 다음 기회엔 아침 일찍 출발하여 정상 코스로 안내하겠다네요. 그러려면 부지런히 체력을 연마하고 비축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왕복 3시간 50분이 걸렸는데요, 그래도 걸을만했습니다.
너는 다시 느꼈습니다. 제주는 대륙이라고, 섬을 4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땅이라고 정의한다면 제주는 섬이지만, 땅의 웅대함으로 말하면 제주는 대륙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4면 모두 바다가 아닌 육지가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너의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정리하면 세계는 유라시아 아프리카 섬, 아메리카 섬, 오세아니아 섬, 남극 섬, 제주도, 민다나오섬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륙으로 말하면 유라시아 아프리카 대륙, 아메리카대륙, 오세아니아대륙, 남극대륙, 제주대륙, 민다나오 대륙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 위대한 섬 제주대륙이여! 2020.8.1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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