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기능과 역할
엊그제 산 책 『다시, 책으로』를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의 편성 특징은 장 절을 편지처럼 구성했다는 것입니다. 번역한 책이라 머리를 싸매고 읽어야 하는데요, 첫 번째 편지에서 저는 읽기 유전자는 문화적으로 형성된다는 문장을 접했습니다. 말하자면 읽기 능력에는 자연 유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를 두뇌의 가소성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가소성은 교육학에서 듣던 말인데요, 사람은 발전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자연 상태의 미성숙한 인간이 교육을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읽기는 문화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며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기존의 교육학적 설명과 맥이 같으나 이 시대에 새로운 언어로 패러프레이즈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심리학적 고민과 정보기술 발전에 따른 디지털 미디어의 영향까지 아울러 현세의 독서문화를 새롭게 분석하고 있네요. 첫 번째 편지를 읽어보고 이 책 전체를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몇 줄 읽은 인상적인 감상을 적을 수밖에 없는데요, 하지만 어느 책이나 첫 번째 장의 기조가 끝까지 유지되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저는 어느 책이나 첫 번째 장의 논조를 매우 유의하는 편입니다. 저자나 역자의 머리말이나 후기를 빼놓지 않고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책의 첫째 편지에서 인상 깊은 글은 편지가 가벼운 장르라는 표현입니다. 편지는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도록 쓰기 때문에 쉬운 언어로 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가벼운 장르라는 표현이 좀 경솔하게 느껴지지만, 쉽게 쓸수록 전달이 잘되는 건 어쩌면 진리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편지 속에는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진실과 배려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문장이나 맞춤법이 틀려도 글 쓴 사람의 진정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이는 예전에 엄마의 편지, 누나, 아버지, 친구의 편지를 받아보신 분들은 다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리운 그 편지들. 그래서 저는 그 편지들을 아직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은 문학이건 논문이건 글을 좀 무겁게 써야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문학에서는 아름다운 문체나 적나라한 문체로 묘사하고, 논문에서는 딱딱한, 너무나 딱딱한 알고리즘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읽기에 지치고 지루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편지는 받고 안 읽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급히 봉투를 뜯고 읽기에 바쁘죠. 그런데 요즘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편지가 사라졌습니다. 이메일이 있지만, 너무 사무적이거나 스팸이 많아 잘 읽지 않습니다. SNS의 댓글은 착한 댓글보다는 비방 글이 많아서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이것도 미디어의 변화가 몰고 온 부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편지는 착한 댓글이며 포용의 소설이며 정성이 담긴 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바람직한 문해력 형성과 효율적 소통을 위해서는 현실이든 학술이든 편지부터 쓰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일기도 편지입니다. 자신에게 쓰는 편지죠. 수필도 편지입니다. 진정한 마음을 담아내야 하니까요. 문장의 기교를 떠나 다소 투박하더라도 우리는 가정에서부터 편지를 쓰고, 글에 마음을 담아 전하고자 한다면 자녀들의 문해력도 서서히 발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전적으로는 읽기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더라도, 인간은 말과 글이라는 문화적 유전자를 타고났으니 걱정할 게 없습니다. 다만 그걸 잘 활용하여 자신과 이웃을 풍요롭게 하면 될 것입니다. 교육의 가소성,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능력의 신장, 언제나 인간에게 부여된 천부적 권한 아닐까요? 2020.4.2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