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과 참선
위선이란 말,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니 의미로는 알 것 같은데 실제로는 무엇일까요? 오늘 유튜브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대한 고려대 석영중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너도 위선자가 아닌지 의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누구든 본인은 위선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를 듣고 너는 위선자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착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욕망 다 챙기고 사는 보통사람들, 그 가운데 너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네요.
우선 위선을 면하려면 상대방, 즉 너를 알아야 한답니다. 너를 통해 반사되는 내가 진짜 나라는 말 같습니다. 너를 알고 너와 소통할 때 위선은 줄어진다는 말일까요? 나와 너는 곧 인간사회를 구성합니다. 인간은 홀로 인간일 수 없기에 말입니다. 인간은 서로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랍니다. 그 사랑은 세간에서 말하는 그런 육욕의 사랑보다 차원이 다른 사랑입니다. 말하자면 ‘인류애’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류애를 말로 하기는 참 쉽습니다. 누구나 말과 글로 인류애를 말하고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과 글이 실제는 아닌 거죠.
오늘 강의를 들으니 사랑에는 추상적 사랑(Love in Dream)과 실천적 사랑(Love in Action)이 있다고 하네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말뿐일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입에 발린 말, 하지만 묵묵히 자기의 할 일,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 말은 하지 않아도 사랑을 행동하는 것이랍니다. 진실한 사람은 말이 많지 않다는 말과도 같네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행동으로 말하지 입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말로 하는 사랑은 일종의 사기, 그래서 사기꾼들은 말을 번드르르하게 한다죠?
너는 몇 년 전부터 글을 쓸 때 나를 너라고 표현하며 나의 객관화를 시도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역 문인들로부터 좀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비판한다고 해서 너라는 표현을 접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석 교수님 강의를 들으니 이런 생각이 더 굳어집니다. 너의 시선에서 나를 보는 매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위선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봉사니 인류애니 찾는 것은 정말 거짓인 것 같습니다. 너의 경우입니다. 글로는 날마다 착한 척하지만 실제로 행동에서 남을 도와주는 경우는 별로 없고 매일 너 살아가기 바쁘니 이게 위선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문인 학자들은 위선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글로는 다들 성인군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대화가 안 되는 사람도 많이 있더라고요. 일단 학자나 대학교수나 정치인들이나 겸손한 분들은 많지 않지요. 선거 때면 겸손한 척하다가 당선되면 언제 그랬냐 그런 식이죠. 시간강사일 때는 겸손하다가도 정교수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꾸는 경우도 많이 보았네요. 따지고 보면 거의 다 위선자입니다. 위선자를 면하려면 정말 적극적으로 겸손하게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롱펠로의 말마따나 목맨 송아지처럼 끌려다니지만 말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겠습니다. 오늘 또 하나의 대어를 건졌습니다. 위선을 지양하자. 참선을 실행하자. 2020.4.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