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인류는 직립 보행을 하는 게 특징입니다. 인류학자들은 이점을 인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동물은 직립 보행을 못 하기 때문인가 봐요. 남극에 사는 펭귄이 외형상 직립보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네들은 새 종류라서, 특히 날지 못하는 물새라서 새 다리로 걷는 것뿐입니다. 다만 다른 새들과는 달리 윗몸을 곧게 세워 걸어서 마치 직립 보행처럼 보입니다. 하기야 그 방법도 표현상으로는 직립 보행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사람이나 펭귄이나 직립 보행의 장점은 시야를 더 멀리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너는 10여 년 전부터 인류의 발생과 진화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책을 구해 탐독해 왔습니다. 인류학자가 아니라 전문적인 어려운 책 말고 대중을 위해 쓴 책들을 주로 보고 있는데요. 진도는 매우 더딥니다. 그리고 전곡선사박물관, 국립중앙과학관, 자연사박물관 등 여러 선사박물관도 탐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시대보다 선사시대 연구가 더 신비스럽고 재미있습니다. 이러한 너의 학습행위는 다 『책과 도서관의 문명사』를 쓰기 위한 것인데요, 올해에는 꼭 이 책을 출판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기장을 섞어 쌀밥을 해 먹고 인근 우암공원 뒤 약수터에 물을 뜨러 갔습니다. 정월 대보름 전날의 차가운 겨울 공기를 마시며, 직립 보행으로 상쾌한 발걸음을 옮기며, 에델바이스 노래를 흥얼거리며 올라갔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분명 급수시간은 7시부터 10시 사이라고 게시되어 있는데, 아무리 수도꼭지를 틀어도 70m 아래 지하수는 올라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디 양수기 전기 스위치가 있나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탐색하는데, 약수터 주변 턱진 계단을 헛디뎌 오지게 넘어졌습니다,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발목이 아팠습니다. 겨우 일어나 걸어보니 잘 걸어지지 않았습니다. 집까지는 한 500m, 간신히 절룩거리며 걸었는데요, 집까지 30여 분이 걸렸습니다. 방에서 한 시간 정도 누워 발목을 쓰다듬었지만, 통증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래도 출판사에 인문 수필집 『뭘 걱정하세요』 원고 교정지를 보내야 해서 우체국을 향해 다시 집을 나섰는데요, 중간에 잡화점 ‘다이소’가 있기에 들러 지팡이를 하나 샀습니다. 생전 처음 산 지팡이, 짚어보니 큰 효력이 느껴지지는 않네요. 오히려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니 손목에도 좀 부담이 오고.
우체국에 가서 택배를 보내고, 그 옆 ‘오케이 정형외과’ 통증클리닉에 가보았습니다. 의사가 발목을 만져보더니 곧 멍들어 부어오를 것이라 예상하며, 발목 부위에 주사를 세대 놓고, 물리치료를 받으라 해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치료받는 데 2시간이 걸렸습니다. 병원을 나올 때는 더 아픈 기분, 집을 향해 또 걷는데 지팡이의 효과 정말 별로 모르겠더라고요. 그러기에 자기 발, 제 다리가 제일이지, 하고 공상하는데, 과거에 익히 들었던 ‘민중의 지팡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민중의 지팡이’와 오늘 산 너의 지팡이를 연관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민중의 지팡이는 주로 경찰이나 위정자를 일컫는 말인데, 저들도 별로 효용이 없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지팡이는 약간의 보조 역일 뿐 결국 너의 길은 너의 건각이 걸어가야 한다는 해묵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정상적으로 걷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밥 먹고, 약 먹고, 음악 듣고, 연주도 하니 서서히 통증이 가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 말대로 발목 부위와 발등이 많이 부어오르네요. 그래도 너는 너의 삼신할머니가 점지하신 원초적 회복력을 굳게 믿어보렵니다. 2020.2.7.(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