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다. 설은 그야말로 해가 바뀌는 첫날이다. 양력으로는 새해가 된지 이미 한 달 열흘이나 지났지만 우리는 음력설이 되어야만 정말 해가 바뀐다는 확신을 갖는다. 절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었다. 집에서 차례모시기가 좀 어려워서 금년엔 절에서 차례를 모셨는데, 집에서 모시는 것과 절에서 모시는 것은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다. 직접 음식을 차리지 못한 '무성의'로 인해 절만 열심히 했다. 부처님께, 조상님께 우주 만물의 진리를 향하여 세배를 올렸다.
세배(歲拜), 참 좋은 풍속이다. 집안 어르신들에게, 스승에게, 이웃에게 새해를 맞으며 서로 절하고 건강과 행복을 비는 그 마음, 그 마음이 모이고 인연되어 세계는 평화롭다. 우리는 날마다 서로 인사(人事)하고, 인사(人事)를 관리(管理)하며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설의 세배(歲拜)는 정말 순수한 인사이니 모든 세배하는 사람들이 1년을 한결같이 순수하고 착하게 살아갈 마음을 내는 것이므로 아름다운 풍속인 것이다.
어제 토요일 날(2008.2.9) 오랜만에 세배를 다녔다. 물론 집에서 아들들에게 요청하여 먼저 세배를 받은 후였다. 이웃 대화마을에 사는 ‘고향 형님’을 따라 서울에 계시는 고향 선배님들의 댁을 찾아 나섰다. 예전에는 잘 연락을 못했고 또 잘 몰라 교류가 없기도 해서, 세배를 하지 않고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바로 이웃에 계시는 고향 형님이 전화를 해온 덕에 그 형님의 인도(引導)로 세배를 따라나선 것이다.
한 시간 여 차를 타고 먼저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 선배님인 서초동에 사시는 동국대 권 교수님 댁에 갔다. 예나 지금이나 조용하게 부처님처럼 맞아 주셨다. 원로 불교학자 다운 온화한 표정으로 옛 고향 이야기를 하시고 술도 권하셨다. 서재에 있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고서들을 보여주시며 앞으로 연구할 과제가 많다고 하셨다. 세배를 드리려고 했으나 극구 사양하시고, 또 같이 간 형님도 세배할 태세를 보이지 않으시기에 할 수 없이 세배는 못 드리고 그냥 ‘심배(心拜)’로 대신해야 했다. 권 교수님은 예전에 나에게 사서의 길을 안내하여 주셨기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저녁 무렵에 권 교수님 댁을 나와 서울대 최 교수님댁으로 갔다. 최 교수님은 같이 간 형님의 중학교 동기로서 나와는 7년 선배가 되시는데, 그간 결혼식장 등에서 몇 번 뵈었을 뿐 댁으로 찾아가 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같이 간 형님과 동기여서 그 형님을 따라 스스럼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고향 생각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모교인 계명(鷄鳴)중학교 김재준 교장선생님 이야기도 하면서 함께 마음속으로 교장선생님께 추모세배를 드렸다. 최 교수님은 한국사를 전공하시는 원로교수님이라서 그런지 사방이 온통 책으로 가득하고 세미나실까지 있어서 집안 전체가 도서관이고, 연구소이며, 아카데미였다. 학생들이 교수님 댁에 와서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립대학’이었다. 최 교수님은 은퇴이후에도 아마 이러한 아카데미활동을 계속할 것 같다.
오늘 세배를 다니며 ‘인간은 평생 배우다 죽는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진작 좀 찾아다니며 선배님들로부터 많이많이 배울 것을... 그러나 지금이라도 적극 따라나서 부담 없이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에 배웠더라면 후배의 진로문제로 걱정을 하셨겠지만 이제 배운다면 그런 장애물이 없으니 부담 없이 가르쳐 주실 것 같다. 그래서 우선 최 교수님이 6월 말로 예정하고 계시다는 중국 실크로드 여행에 따라가기로 했다. 그리고 정보를 얻는 대로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배움의 행보를 계속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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