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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어린 왕자의 꿈

이글은 방송대 글쓰기 리포트로 작성한 것임. 오늘(2019.6.2) 성적을 확인해보니 만점 나왔네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요. 하하.

어린 왕자의 꿈

그는 계룡산 산골에서 어린 왕자처럼 자랐다. 태어난 동네 이름은 우적(禹跡) 마을, 임금 우, 자취 적,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려고 왔다가 자취를 남기고 간 동네였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관(仙官)이라 치켜세우셨다. 그는 11남매 중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위로는 누나 둘이 살아남았다. 1930, 1940, 1950년대의 열악한 보건환경에서 그 3남매는 운 좋은 생존자였다.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왕자처럼 자랐다. 그리고 어렴풋이 왕자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36년간 일본 제국주의 사무라이통치를 감내한 백성들,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겪은 1950년대 한국사회는 피폐했고,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배달의 후예들에겐 은근과 끈기, 인간미가 남아 있었다. 산골 스물두 집, 백여 명의 우적 사람들은 콩 한 톨도 나누어 먹는다는 히말라야 라다크 사람들처럼 인간미가 넘쳤다. 고난을 겪은 민족은 유대인처럼 결속력이 강한 법이다. 그 마을 사람들은 자연과 더불어 채집경제 생활을 하면서도 헐벗은 자유 대한의 품속에서 가난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바로 위 누이와는 5살 터울, 누이가 6학년 때 그는 1학년, 엄마도 누이도 그를 엄마처럼 보살펴주셨다. 누이는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사정으로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그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아들이라는 시대적 특권, 그리고 빈곤 가정 장학생 혜택을 받았다. 당시 그곳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학비면제 특혜를 주신 것이다. 그는 지금도 일본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을 나오신 막걸리 호인 김재준 교장 선생님을 생각하면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는 심성이 착한 아이로 자랐다. 공부도 제법 잘했다. 그 시대 사회 분위기를 알고, 가정형편도 잘 알아 일찍 철이 들었다. 그런데 중학교 졸업 직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진학의 길은 요원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대전 모 공업고등학교 장학생 시험에 합격했지만, 들어가 보니 적성이 맞지 않고, 집에서 하숙생활비를 댈 수도 없어 3개월 만에 자퇴했다. 그리고 농사일을 하며 밥상을 다리에 끼고 책상 삼아 공부했다. 독학 3년 만에 고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에 합격, 이어서 행정공무원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는 스물한 살에 대한민국 국가공무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겐 또 다른 왕자의 꿈이 꿈틀거렸다.

1970년대 개교한 한국방송통신대학은 당시 배움에 목마른 청년들에겐 구세주였다. 그는 공무원 생활을 하며 방송대 전문대학과정 행정학과에 다녔고 관악산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졸업했다. 서울대생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대학을 나왔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공무원보다 대우가 두 배나 좋은 국영기업으로 직장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왕자의 꿈은 그대로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교사, 교수로 구체화 되고 있었다. 계속 직장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 그런데 또 방송대가 학사과정 정규대학으로 승격하면서 학업의 기회를 주었다. 그는 곧 행정학과에 편입하여 33세에 방송대 학사 1회 졸업의 영광을 안았다.

그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회사 인사과에 서울 전근을 청원했고, 합리적인 인사담당자의 덕택으로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그는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갔다. 나이는 이미 34, 방송대학에서 익힌 학습방법이 대학원에서도 효력을 발휘했다. 그가 선택한 전공은 문헌정보학,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또 졸업 후 교수를 꿈꾸다 보니 희소성도 고려했다. 박사학위를 받으면 교수로 채용될 기회가 다른 전공보다 많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석사과정을 마친 직후 직장에서 승진시험에 합격하는 바람에 간부가 되어 지방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울진, 남원을 거쳐 대전으로 전근했다. 그러는 사이 나이가 40이 넘어버렸다. 그래도 그는 꿈을 위해 다시 서울로 대학원 박사과정에 등록해 열차 통학을 했다.

그러는 사이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둘과 셋이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엄마 없는 하늘아래 아이들은 방황했다. 하지만 그는 왕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든 회사를 명퇴하고 논문 작성에 매달려 200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이 49, 회사 일로 학업을 지체하는 사이 박사의 희소성은 거의 사라졌다. 그는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도는 대학의 일용직 시간강사, 가정경제가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꿈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는 평생 꿈과 희망을 먹고 살아왔고 그 꿈을 버리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아들들이 철들어 결혼하면서 그는 고령사회에 동참하며 독거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강의는 계속하는 행운을 누린다. 평생학습시대 평생교육원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는 교수 정년 65세가 넘으면 시간강사에게 강의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평생교육원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평생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그는 스스로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잔병도 치르지 않았고, 장기적으로 복용하는 약도 없다. 매일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대머리를 빗고 집을 나선다. 세상을 관조하며 글을 써 본다.

2019년엔 방송대 일본학과에 편입했다. 동양학을 하려면 중국과 일본을 좀 알아야 하겠기에 나이를 무시하고 그는 다시 학생이 됐다. 이제 그의 희망은 일본도서관 연구, 그들의 우수한 도서관과 독서문화를 연구하여 우리 문명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남은 에너지를 사용하고자 한다. 그는 최근 설문조사도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통계 해석을 내놓았다.

노력의 정도와 성과의 정도는 같다. 50% 노력하면 50% 성과를 달성하고, 95% 노력하면 95% 성과를 달성한다. 표준편차는 플러스마이너스 5%, 여기서 5란 지능지수를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지금까지 목표 대비 약 80% 노력한 것 같다. 그리고 100세 시대를 맞아 100%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100%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린 왕자의 꿈은 돌고 돌아 이제 거위의 꿈을 이루었지만 앞으로 30, 목표 대비 100% 노력한다면 100세 인생을 수확하는 그날엔 100% 왕자의 꿈을 이루리라 상상하며 오늘도 상쾌한 기분으로 학교에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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