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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법정스님의 '인도 기행'

  요즘(2008.1월) 법정스님의 ‘인도기행’에 빠져있다. 주로 전철에서 읽고 있는데, 인도를 가지 않고서도 내가 인도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멋지고 절묘한 표현들, 역사를 넘나들며 리얼하게 그려내는 현장의 풍경, 인도여행에서 다시 느끼고 확인하는 ‘달관의 종교관’이 나를 매료시킨다. 좋은 글을 읽으면 독후감을 쓰고 싶은 충동은 누구나 느낄것이다. 그러나 이런 글을 읽고 쓰는 독후감은 오히려 군더더기다. 그런데 뭔가 쓰고 싶은 욕망을 쉽게 포기하기 어렵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스님의 문장 몇 단락을 그대로 가져왔다.
 

“불교도들에게 최대의 성지인 이곳 보드가야는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이슬람교 사원의 그 우렁찬 예배드리는 목청으로 새날을 맞는다.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바라나시(베나레스) 교외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의 아침도 이런 목청으로 어둠이 걷힌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시크교, 자이나교, 기독교, 불교가 한데 어울려 공존하는 인도의 종교풍토에서는 다른 종교의 의식이 조금도 귀에 거슬리지 않고 바람소리처럼 자연스럽게 들려온다.

  모든 종교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생겨난 것이라고 볼 때, 종파적인 편견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옹졸한 마음의 소산이다.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했을 뿐이다. 그 지역의 특수한 풍토와 문화적인 환경,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그와 같이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 표현된 말에 팔리지 않고 말 뒤의 숨은 뜻을 따른다면, 자기가 믿지 않는 종교라고해서 무조건 배격하거나 역겨워할 것은 조금도 없다.

  어떤 종파를 물을 것 없이 광신(狂信)은 그 자체가 독성을 지닌다. 인간의 이성을 잃고 맹목적인 열기에 들뜨면, 종교의 보편성을 망각하게 된다. 마치 한쪽 가지만을 붙들고 오로지 그것만이 나무 전체라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더 직선적으로 말한다면, 진정한 종교인은 종교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외형적인 종교에 얽매이면 자신의 내면에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신성(神性)과 불성(佛性)을 일깨우기 어렵다. 개념화된 부처나 보살 때문에 지금 내 안에 살아있는 부처나 보살을 보지 못하고, 관념으로 굳어진 하느님 때문에 우리들 이웃에서 살아 숨쉬는 진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종교의 나라 인도를 여행하면서 한결같이 느낀 점은 그들에게 있어 종교란 공기와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종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이므로 그토록 가난하면서도 궁기를 풍기지 않고 낙천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폭력을 싫어하는 온유한 성품도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우러난 자연스러운 몸짓일 거라고 여겨졌다.”(법정. 인도기행. 샘터. pp.84-85)


   평소에 종교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으나 말 할 수 없었던 나의 ‘고통’을 이렇게 속 시원하게 풀어주시니 가슴이 후련하다. 이 책을 만난 것은 스승을 만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길을 아는 스승으로부터 길을 인도받아 인도를 가면 나도 스승의 길을 절반이라도 따라갈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뿌듯해진다. 내가 인도를 간다면 스님이 느끼신 ‘인도냄새’를 맡으며 인도의 인간적인 맛과 멋, 그리고 달관의 종교를 가슴 한 아름 담아올 수 있을 것 같다. 할렐루야 아멘! 나무석가모니불! (200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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