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사주신 꿀 포도
중학교 2학년 때인 것 같다. 학기 초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갓 나오신 이 선생님이 과학 선생님으로 오셔서 너희 반 담임을 맡으셨다. 어느 덧 학기가 무르익어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아니 그 시절을 약간 지나 일반 포도가 검붉게 익어가는 시절이었나 보다. 너와 친구 2명은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방과 후에 남아 선생님이 지시한 교실 환경개선작업을 했다. 붓글씨도 쓰고 도표 같은 것도 그렸다.
친구들이 일을 하느라 말이 없어질 무렵, 한 친구가 “아이, 포도 먹고 싶다.” 이러는 거다. 등굣길에 포도밭을 지나다니는 친구였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너희들 정말 포도 먹고 싶냐?” 하시기에 너희들은 일제히 “예.” 하며 촌스럽게 웃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먼저 포도 먹고 싶다고 말한 그 친구를 시켜 포도를 제법 많이 사왔다(한 일곱 송이 정도). 너희들은 포도를 포장한 신문지에 둘러 앉아 선생님 보다 먼저 포도를 빨리빨리 따 먹었다. 씨까지 와작와작 씹어 마치 염소처럼 짭짭짭 잘도 먹었다. 선생님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너희가 먹는 모습을 대견한 듯 바라보셨다. 그 때 그 포도 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하하.
그 선생님은 서울서 놀러 내려온 서울대 대학원생 친구를 너희 수업에 참관시키기도 했는데, 그 대학원생은 긴 영어단어를 학생들의 노트에 필기체로 멋지게 써 주면서 약간 뽐내는 듯 지식인다운 행동을 보였다. 하하. 그 때도 네 눈에 그게 보이더라고. 하하.
그런데 네 기억엔 이 선생님이 서울대를 나와 실력은 좋아보였는데 말을 멋지게 하려해서 그런지 설명력은 약 2% 부족했던 것 같다. 하기야 아무리 중학교라도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을 다 가르쳐야 했으니... 공자가 하늘 천자에 막힐 때도 있는 법이지. 하하. 아니 그런데 그 때 포도 잘 먹어놓고 50여년이 지나 무슨 딴 소리? 아니지, 그런 선생님이 더 인간적이잖아. 수업의 정교함 보다 선생님의 인간다움이 더 감동을 주는 법이니까. 하하. 그래서 이렇게 그 때를 기억하잖아. 그 선생님도 지금 쯤 80세는 되셨을 텐데, 인터넷을 아무리 검색해도 이정석 선생님을 찾을 수가 없네. 선생님, 그립습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세요. 2017. 11. 2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