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적령기
너는 평생 대학을 동경하며 이 대학 저 대학 대학을 다니고 있다. 실버가 된 이 나이에도 언제나 대학이 그립고 좋다. 이번 학기에는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 대림대에 주당 15시간 강의를 나가고, 수요일, 금요일에는 서울대에 공개 강의를 들으러 간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학생 같고, 언제나 젊은이 같고, 언제나 교수 같아 좋은 점이 한둘이 아니다. 요즘엔 값싸고 좋은 점심을 먹으러 매일 송파복지관에 가지만 거기서는 밥만 먹고 바로 나온다. 참, 화요일엔 2시간씩 포토샵을 배우니 복지관서도 학생 행세는 하고 있지. 그런데 복지관에선 희망이나 에너지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10살쯤 더 늙은 느낌마저 드니 참으로 너는 이기적인가보다. 그리고 노인들에게 한마디라도 말을 붙여보면 어째 그리 장황할까? 물어보지도 않은 시시한 이야기를 계속 들고 나온다. 하하.
오늘 서울대 규장각에 가서 무료 강의를 들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과 당대의 화가 안견의 만남, 그리고 그들의 예술 활동과 그 말로에 대한 강의였다. 다른 날 강의를 들을 때는 많이 졸렸었는데 오늘 강의는 젊은 여성 미술사학자가 또릿또릿하고 재치 있게 설명해서 그런지 전혀 졸리지 않았다. 강사는 강의의 제목을 “분홍빛 동상이몽”이라 붙이고 안평대군과 안견이 만들어 낸 그림 “몽유도원도”의 자초지종을 재미있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오래 같이 살면 안 된다는 뼈 있는 진담을 했다. 안평대군과 안견도 결국은 불행한 결별을 했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중에는 “가족이 무덤”이라는 좀 끔찍한 말까지 했다. 하하. 저분이 결혼은 하신 분일까, 여성이 저 정도면 똑똑하기는 한데 상대가 누구든 배우자감으로는 좀 적절하지 않겠다, 싶은 생각도 스쳐갔다.
너는 “홀로 사는 정겨움”이라는 어림없는 제목을 달고 책을 쓰고 있다. 그래서 저 분의 저 말이 진리처럼 다가와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사실이 그렇지. 혼자 살아보니 간섭을 안 받아 이렇게 편하고 좋은 걸. 그런데 생각해보니 너는 이미 가족이라는 행복을 다 겪어보았고 이제 실버가 되어 홀로 독거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중이니 젊은 사람들과는 완전 입장이 다르지. 젊은 사람들은 적령기에 결혼하고 부부간에 서로 마음 맞춰 오순도순 자식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가족이 무덤’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나, 그러다간 나라 망하겠다. 에이 저 강사의 저 말, 젊은이가 들어서는 안 되겠다 싶네. 마침 강의 듣는 수강생들은 거의 다 노인이고 젊은이들이 별로 없어 다행이지. 하하.
진리라는 것도 나이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나 보다. ‘진리 적령기’가 있는 걸까?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 나이 들어가며 깨닫게 되는 것, 그런 많은 경험들을 반추해 보면 연령에 따라, 개인차에 따라 ‘진리 적령기’는 다르다는 게 확실하다. “자식을 낳고 키워봐야 부모마음을 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평생 행복하려면 진리를 가급적 빨리 깨닫고 되도록 오래 즐기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서로 격려하고 봉사하는 정신도 발휘하고 그렇게 백년해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지, ‘가족이 무덤’이라고 미리 깨달아버리면 그런 분은 젊어서부터 혼자 밥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니 그 편이 더 불행한 삶 아닌가, 오늘 따라 저 말에 시비를 걸고 싶다.
집에 와서 너도 ‘서울대학교’가 들어간 졸업장이 있지 싶어 졸업장을 꺼내보았다. 과연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방송통신대학”졸업장이 있네. 하하. 부설이면 어때, 서울대학교인데. 하하. 너는 이미 1978년에 서울대학교명이 들어간 졸업장을 받고, 그 뒤 성균관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고 또 이 대학 저 대학 강의를 하며 서울대학에도 계속 다니고 있으니, 주변인이건 경계인이건 ‘서울대생’이지, 아니 그게 부담스럽다면 ‘서울대인생’이로고, 이쯤 되면 진짜 서울대 나온 너의 친구도 네가 ‘서울대인생’이라고 인정해 줄까? 하하. 아니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지. 너대로 네 멋에 이런 글이라도 남기면서 균형 있게 살면 그게 행복인 게지 뭐. 서울대 졸업장이 대수냐? 하하. 예쁜 손주는 추석에나 보러가야겠다. 하하. 2017. 9. 23(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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