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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범어사 탐방

범어사 탐방

 

바나나 1송이, 포도 2송이, 고소미과자 1, 참이슬 1, 소주 컵 1(이상 제사용), 정수기 물 2, 두유 2, 커피믹스 2, 녹차 메밀차 각 1, 종이컵 5, 칫솔 1, 치약 1, 수건 1(이상 생활용품)을 비닐 봉투에 따로 챙겨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어제 카센터에서 기슬자의 육안 점검을 받아 둔 열일곱 살짜리 너의 백마 수동차에 준비물을 싣고 부릉부릉 시동을 걸었다. 입추를 지나니 피부에 와 닿는 새벽바람이 살갑다. 스마트폰 내비 티맵을 켜고 통도사를 찍었다. 그리고 인근 단골주유소에 휘발유를 주유하러 갔다. 그런데 새벽이라 그런지 영업을 하지 않았다. “오라, 어디서 기름을 넣지”, 은근 걱정하며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송파 IC로 들어갔다. 곧 내비양이 안내를 했다. “5킬로미터 전방에 휴게소가 있습니다. 휴게소에 주유소가 있습니다.” 너에게 꼭 필요한 멘트를 해준다. 중부고속도로 진입 전 만남의 광장 휴게소 주유소에서 5만원어치 무연 휘발유를 넣었다. 다시 부릉부릉, 그런데 휴게소 출구에 트럭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다 길이 미로 같아서 엉뚱한 데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 나와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스마트폰 내비가 통도사까지 도로지도를 그려준다. 중부고속도로 호법, 영동고속도로 여주,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 상주영천고속도로 영천, 경부고속도로 통도사. 이제 서울서 부산가는 고속도로가 경부선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 어느 쪽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서 부산행 지름길도 다르다. 대한민국의 도로망은 이제 수준급이다. 어디를 가든 도로 품질이 좋다.

 

여주휴게소에 들렀다. 네가 1997년 가을학기부터 충주 건국대학교를 20년이나 통근했으니 이 도로, 이 휴게소는 너의 손바닥 안에 있다. 휴게소 식당 음수대에서 커피믹스를 꺼내 종이컵에 쏟아 넣고 더운 물을 받아 커피봉지로 휘휘 저었다. 미지근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그런데 지난 대선에서 낙선하고 요즘 어떤 당대표로 출마한 안 모 씨가 만든 신조어 극중주의라는 말이 생각났다. 극히 중도주의라는 뜻이라는 데 중도이 들어가니 참 어색하다. 그래서 어떤 TV토론자는 이를 두고 극히 차거운 미지근한 물이 어디 있느냐며 웃었었다. 하하. 어패가 있는 말이지.

 

다시 괴산휴게소에 들렀다. 이번엔 두유 1개를 마시고 또 출발. 장장 왕복 800km가 넘는 장거리 운전에서 기사가 컨디션을 유지하는 요령은 휴게소마다 쉬어가는 것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는 월악산 수안보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중원의 산길이다.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산 산 산, 천상에서 산허리에 내려와 유영하는 하얀 목화 구름이 신비롭다. 선관이 선경을 달리는 기분. 노래를 흥얼거렸다.

 

백운 사이로 백마를 타고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아 장단 맞추어 노래 부르니 옛 추억이 그리워서 눈물 핑 돈다.

빰빠라 밤 빰빠라 밤 빰빠라 밤밤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달려 나가자.

 

터널을 지나 꽃구름 지나 다시 터널 지나 다시 꽃구름 장단 맞추어 씽씽씽씽씽 그야말로 상쾌하게 씽씽 달린다.

빰빠라 밤 빰빠라 밤 빰빠라 밤밤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달려 나가자.

 

크리스마스 징글벨 노래를 억지로 패러디 하는 순간 백마는 어느새 낙동강구미휴게소에 도착했다. 이번엔 화장실에서 신장에 고인 유린(urine) 워터를 센터 파이프로 내려 붓고 집에서 가져온 정수기물을 마셨다. 갑자기 너 같은 사람만 있으면 휴게소 상인들이 굶어죽겠다 싶어 편의점에 들러 초콜릿 자유시간’ 2개와 스낵과자 양파링을 샀다. 갚은 32백 원. 하하.

 

영천분기점을 지나 건천휴게소에서는 10분 정도 눈을 붙었다. 단잠이었다. 다시 화장을 좀 고치고는 도자기 및 목공예 기념품 가게를 구경했다. 나무로 만든 예쁜 밤색 안마 봉이 보인다. 하지만 자넨 안마를 싫어하니 살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나무로 깍은 예쁜 숟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3천원이란다. 나무숟가락은 네가 스페인산 꽃가루를 떠먹는데 필요하다. 나무 숟가락 1개를 사서 먼지를 씻어 들고 다시 수동차 운전석에 올랐다. 공사 중인 고속도로가 이어진다. 여긴 작년에도 공사 중이더니 도대체 언제까지 공사를 할 셈인가. 불평을 중얼거리며 공사장 장애물 사이를 곡예 하듯 달렸다. 우둘 투둘 꾀나 긴 공사구간을 지나 이윽고 통도사 IC로 나오는데 고속도로 요금이 겨우 2700원 찍힌다. 서울서 양산 통도사까지 왔는데 2700원이라니 어딘지 이상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물어볼 데도 물어볼 사람도 없다. 국도로 이어지는 양산 포장도로를 지나 어머니가 계신 석계공원에 이르니 오전 11. 여섯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오전에 도착했다.

 

안동 권씨 묘비를 확인하고 잠시 주변을 살핀 뒤 서서 묵념하고 과일과 과자를 꺼내 놓고 술을 따랐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너의 시련일지라.” 70년대 아침이슬 노래가 이곳에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성묘객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띈다.

 

어머니 편히 계셨는지요? 제 삶이 어머니 기대에 미치지 못해 너무 죄송합니다. 저는 지난 몇 년간 인생 운전을 잘 못하는 바람에 생활이 어려워졌지만 아직 할 일이 좀 남아 있습니다. 책을 몇 권 더 써야하고, 우리 가족의 역사도 글로 남기고 싶어서요. 이 일들을 마치면 저도 어머니와 누이 뵈러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참 열흘 전에 손주를 보았습니다. 어머니에겐 증손주네요. 아주 예쁘고 똘방하게 잘 생겼어요. 어머니, 우리 집에 새사람이 나오니 정말 기뻐요.”

 

저절로 눈물이 내려온다. 햇볕아래 20분 쯤 지났다. 너는 다시 두 번 큰 절을 올리고 어머니의 음택을 떠나 마을로 내려왔다. 시각은 1140, 범어사에 들르기로 했다. 아니 미리부터 어머니 성묘 후에 범어사를 가보기로 작정 했었다. 다시 내비를 찍었다. 범어사는 양산에서 멀리 있지 않았다. 12시 쯤 범어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부산시내에 있는 절인 줄 알았는데 제법 수목이 울창한 산 속에 있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이 절에 주석하고 계실 때 팔만대장경에서 요점을 발췌하여 1913불교대전핸드북을 출판하셨다는데, 그래서 꼭 와보고 싶었는데, 과연 절의 자태와 규모가 웅장하다. 몇 백 살 돼 보이는 은행나무가 서 있고 백중 지장기도 및 생전 예수재 안내 현수막, 서병수 부산시장의 특강 안내 현수막이 붙어 있는 건물이 보이는데 사람들이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너도 호기심에 그곳으로 가보았다. 마침 점심 공양시간이라 사람들이 줄서 있는데 너는 줄서 있는 한 분에게 물어보았다. 여기서 식사를 해도 되는지, 그랬더니 대답이 흔쾌하다. 아무나 무료로 점심을 먹을 수 있단다. 잘 됐다. 이 근처엔 식당도 안 보이던데 여기서 식사를 하게 됐네. 커다란 스텐 대접에 쌀밥, 콩나물, 김치, 산나물, 해초나물, 고추장 그리고 미역 오이냉국을 셀프로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 밥과 나물을 비벼가며 맛있게 먹는데 자연스레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젊은이들은 별로 없고 거의가 노인인데 표정들은 각양각색. 너는 속으로 이 밥을 걸인처럼 먹으면 걸인이 되고 부처처럼 먹으면 부처가 된다. 如乞食 爲乞人 如佛食 爲佛人.” 하고 누군가가 말했을 법한 문구를 다시 지어보았다. 어법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뜻은 그런대로 좋은 것 같아 너는 밥을 부처님처럼 먹어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하하. 이런 마음이 인간의 자존감 아닐까?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범어사도 식후경식사 후 경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사천왕문, 대웅전, 지장전, 종루, 종무소, 성보박물관... 1시간 반 가량을 사진을 찍어가며 돌아다녔다. 화단의 아름다운 꽃들, 싱싱한 잎들의 어울림에 감탄하고, 흙돌담 기와지붕 기와의 도열에 경이를 표하며, 박물관 앞마당 돌 포장, 그리고 큰 돌들만으로 아귀를 딱딱 맞춰 쌓아놓은 축대를 보고 새삼 놀랐다. 예전에 산골 집에서 축대 쌓던 6척 장부 아버지 모습을 떠올려본다.

 

어느새 두시가 넘었다. 욕심 같아선 부산에서 하루 밤 묵고 남해안으로 돌아 해남 대흥사로 백양사로 여행하고 싶지만 토요일 강의를 앞두고 있어 그냥 서울로 회향하기로 했다. 이제 부산출발 서울행이다. 내려왔던 고속도로를 상행선으로 갈아타고 달리는데 이번에도 휴게소마다 거의 들르기로 했다. 비가 내렸다. 그런데 어느 구간에선 약한 비가 내리고, 어느 구간에선 강한 비가 내리고, 어느 구간에선 비가 전혀 내리지 않았다. 산 하나를 두고도 터널 이쪽엔 비가 쏟아지는데 터널 저쪽은 비가 오지 않았다. 비도 이제 동네마다 다르게 온다. 기상청에서 일기예보하기 참 어렵겠다 싶다. 이젠 동네마다 일기예보를 따로 해야 할 판이니. 예를 들면 문정동 가끔 구름이 끼고 이슬비가 내리겠습니다. 잠실본동 맑겠습니다. 가락본동 가끔 소나기가 내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야 할 판이다. 빅 데이터를 활용해도 예측하기 참 어려울 것 같은 변화무쌍한 날씨. 그래도 호모 데우스라니 방법은 있을 것 같다.

 

괴산 휴게소에서 저녁식사로 설렁탕을 사 먹었다. 그런데 국물이 밀가루를 탄 것처럼 부연해 국물은 절반만 먹었다. 내년에는 괴산에서 설렁탕을 사먹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여주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저녁 8시경 서울 너의 도서관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들이 내가 차를 몰고 부산 갔다 온다고 했더니 은근 걱정이 되었는지 손주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보내왔다. 아들에게 곧 전화를 했다. 나 부산 잘 다녀왔어. 지금 막 도착했네. 손주가 점점 똘똘해 지네. 하하 좋다. 하하. 2017.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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