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행동인문학
나는 나다. 너는 누구니? 너는 너냐? 그래 맞다. 그래서 우리다. 너와 나의 우리, 우리 집, 우리 아기, 우리 가족, 우리 마누라, 우리 남편, 우리 동네, 우리지구, 그런데 우리 마누라, 우리 남편은 좀 표현에 어폐가 있네. 하하.
너는 새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너에게 발아 현미밥, 김 찬(김, 김치), 누룽지 숭늉으로 제법 융숭한 식사를 대접했다. 누룽지는 예전 무쇠 솥 누룽지 바로 그 맛이다. 후식으로 요구르트를 하나 마셨다. 그리고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하는 종편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잠시 온수매트 위에 앉아 너와 나와 우리를 생각해 본다. 우리 새해엔 어떤 착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 것인가? 착함에도 품질의 층위와 결이 있는 것이기에 어떤 층위의 선(善)으로 너와 나의 성품(性品)을 가꿀 것인가? 여기 까지 생각하다가 생각이 막혀 화계사로 신년 여행을 떠난다. 다녀와서 이어 써 보도록.
삼각산 화계사에 가서 너의 칼럼 ‘새해의 종소리’가 들어있는 법보 1월호를 챙기고 대웅전 앞에서 합장 기도한 후 공양 간으로 내려왔다. 신도, 비신도, 식탐이 얼굴에 서린 중생들, 너도 그 중 한 사람이지. 인간은 입구 상 괄약, 소화기 파이프라인 배관, 출구 하 괄약으로 유기적으로 조직돼 있으므로 식탐은 당연한 생명의 원리지. 줄서서 수저 한 개, 비빔 밥 한 대접, 된장국 한 공기를 받아 맛있게 먹어치웠다. 절밥에 고사리는 한약에 감초와 같다. 아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군중 속의 혼 밥. 줄서 떠밀려 설거지를 마치고 종각 주변을 서성였다.
이제 가자. 가방에 법보 세권을 더 챙겨 넣고 일주문으로 내려오시는데, 일주문이 일주문으로 보이지 않네. 양쪽에 보조 기둥이 두개씩 있으니 3주문인데, 지붕의 쓰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보조기둥을 덧붙인 것이지. 백과사전에 보니 일주문은 절 입구에 있는 문으로 세속의 번뇌를 끊고 마음을 일심(一心)으로 통일한 후 청정한 가람으로 들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풀이되어 있다. 그래서 보조기둥이 있더라도 기둥 수를 세세하게 따지지 않기로 한다.
전철 열차 안에서 책을 읽었다. 제목은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쓴 『그 아이만의 단 한사람』. 학교에서 문제아를 정상아로 지도한 체험담이 주저리주저리 적혀 있다. 사례마다 감동적인 내용들이어서 읽는 동안 너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렇지, 이런 게 인문학이지. 인문학엔 기쁨, 슬픔, 감동이 버무려져 있지. 사람다우려면 눈물은 필수지. 눈물 없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 아닐 거야. 인간을 인간답게 바로잡아 주는 인성교육, 이런 게 바로 행동인문학 아닐까? 너의 양 노안에다 천연 안약을 칠갑하며 어느덧 너의 인문학도서관 둥지에 들어왔다. 두시 반이다.
착함의 층위와 결은 무수히 많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도 그 층위와 결은 다르다. 그래서 착함의 층위는 일률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착함의 층위에는 박애, 정의, 용기, 실천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조건 없는 인간애라 할 수 있으려나. 저자는 스토리 두잉(story doing)이라는 책도 소개했다. 스토리텔링을 스토리 두잉으로 진화시켜야 한다는 것, 이야기를 단순히 이야기로 끝내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를 실행하는 사람을 스토리 두어(story doer)라 한다. 그렇다면 이를 ‘행동인문학’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오늘 책과 함께한 너의 여행은 감동이었다. 2017. 1.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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