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 볼 출정
아침 6시에 집을 나섰다. 난생 처음으로 국립공주박물관 앞 우드볼 필드를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어제 다이소에서 2천원 주고 산 흰색 팔 토시를 끼고, 집에 있는 빨간 모자를 쓰고, 아들며느리가 사준 보라색 티를 입고, 까만 등산복 바지를 입고, 16년이나 된 내 백차를 몰고 시원한 아침 공기를 갈랐다. 마치 우드볼 갈라 쇼를 보러 가는 기분. 우선 모자로 알머리를 가리니 기분이 훨씬 젊어진다. 이럴 땐 교황이나 추기경의 뚜껑모자가 부럽지 않다.
스마트 폰으로 내비를 찍고 수지에 사는 선배 교수님을 픽업하는 게 오늘 나의 첫 임무다. 막힘없는 새벽의 고속도로, 룰루랄라 35분 만에 수지 녹십자 본사 인근에 도착했다. 그런데 약속장소를 못 찾아 조금 헤맸다. 두 차례 전화 통화 끝에 곧 선배 교수님을 만났다. 다시 20여분을 달려 기흥 IC로 가 권 교수를 기다리니, 20분 후 권 교수가 2015년형 검은 세단을 몰고 약속장소로 나왔다. 아침요기용으로 쑥떡과 무화과를 싸가지고 왔다고 했다. 나는 조건반사로 군침을 삼키며, 내 차를 기흥 IC부근 안전한 곳에 새워두고 좋은 권 교수 차를 탔다. 왱왱왱...씽씽씽... 그랜저(우리말 발음은 충청도 말로 그란디유)의 승차감은 마치 스키를 타는 것처럼 리드미컬하다. “그란디유 승차감이 참 좋네. 그려.”
그런데 드라이버 권 교수가 “이 교수에게 전화” 라고 음성으로 명령하니, 곧 음성 여비서가 “예,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겠습니다.” 하며 전화를 걸어준다. “교수님, 어디십니까? 저희는 지금 막 기흥 출발했습니다. 아 네, 교수님도 지금 출발하신다고요? 예, 예, 그럼 이따 공주에서 뵙겠습니다. 조심해 오십시오.”
다시 권 교수가 “김 교수에게 전화”라고 말하니 또 그 여비서가 연결해준다. 전화상대는 여성이다. 상대방에서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김 교수님 너무 일찍 전화했지요? 미리 말씀 드렸어야 하는데 지금서야 교수님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지금 공주에 우드볼 하러 내려가는 중입니다. 교수님, 시간 되시면 지금 내려오시지요. 1시간 10분밖에 안 걸리거든요” 하니 상대방은 아직도 잠이 덜 깨어 “오늘은 안 된다고, 잘 놀다 오시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룰루랄라, 1시간 10분 만에 국립공주박물관 앞 우드볼 필드에 도착했다. 영어로 필드라고 쓰니 국어를 사랑하는 나 자신 좀 켕긴다. 우리말로 잔디 들이라고 쓰면 좋겠건만 다 필드, 필드 하니 혼자 잔디 들이라고 써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또 골프나 우드 볼은 다 외국 출신이니 경기장도 필드라고 불러야 어울릴 것도 같다. 그래도 나의 국어사랑 정신만은 마음에 품은 채 우드볼 전용 필드에 들어섰다. 금강을 끼고 있는 거대한 고수부지, 군데군데 소나무가 있는 멋지고, 길고, 넓은 잔디 광장이다. 아침 8시 40분, 공주 우드볼 동호회 회원들이 일차 경기를 마치고 포도를 먹으며 낯선 우리를 반겨준다. 아하, 이래서 운동이 좋은가 보다. 낯선 사람도 인간적으로 친근하게 대해주니. 전에 골프하는 분들로부터 느낌을 받은 것처럼 이런 필드 운동은 일종의 사교활동도 된다. 특히 골프는 고위 공무원이나 기업가들의 사교용, 접대용이 된지 오래다. 언론에서 ‘골프 접대’라는 용어를 들어본 기억도 있다. 그래서 종종 연애, 부정청탁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운동과 사교, 둘이 어울리는 것 같긴 한데, 그 어울림 속에서도 언제나 그 본연의 순수성은 지켜야 할 것 같다. 최근 태극 낭자 골퍼들이 기부천사가 되는 것처럼, 운동, 친교, 자선의 그 순수성과 윤리는 잘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지. 전에 국회의장 출신 70노인 박 아무개처럼 말이지.
지도교수가 오기 전에 공주 동호인 두 분의 지도로 기본자세를 좀 배워 보았다. 엉거주춤하니 어설프고 공이 똑바로 가지 않고 자꾸 옆으로 샌다. 그러나 그런대로 필드를 걸으며 한 20여분 연습을 했다. 마침내 오늘 우리를 지도해주기로 한 이 교수가 나타났다. 훈련생 여러 명을 대동하고 올 줄 알았는데 쫄 바지를 입은 여자 선수 한명만 데리고 왔다. 반갑게 악수들을 나누고 곧 지도를 받았다. 우드볼 채를 잡는 왼 손, 감싸 쥐는 오른 손, 그리고 허리 자세, 엉덩이를 빼는 정도, 어깨 폄 정도, 손목의 휨 정도 등 체육 전문가로부터 세밀한 지도를 받았다. 코치들은 누구나 피교육자가 잘 따라 하지 못하면 핀잔을 주기 마련인데, 우리에겐 늙어서 그런지 핀잔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따라하지 못할 때는 음성이 좀 달라졌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니깐요. 자, 보세요, 손목을 배구하듯이 그렇게 하면 안 되고요, 똑 바로 펴세요, 왼 팔을 쭉 편 상태로 몸통을 오른 쪽으로 같이 돌렸다가, 손목에 힘을 빼시고, 채의 헤드 무게로만 볼을 맞추세요, 아니, 아니 고개는 돌리지 마시고, 공을 보시고요, 그렇지, 그렇지.”
참 기본자세 지도하는 것도 쉽지는 않겠다. 나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도자의 말씀에 따라 기본동작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어떨 땐 되고, 어떨 땐 잘 안 되고. 그런데 기본자세가 되었을 때 공을 맞추면 공이 직선으로 굴러갔다. 조금이라도 빗맞으면 공은 옆으로 삐져 나간다. 참 이것도 물리의 법칙이지. 힘의 운동, 방향과 세기, 그래서 스포츠는 과학이 된 거다. 스포츠과학 말이지. 이 운동도 힘의 방향이 중요하다. 어제 인터넷에 ‘우주 등방성’이라는 용어가 떴었지. 우주에는 방향이 없다고. 그래서 방향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우주는 원래 방향이 없는 거라고. 그럴 것 같다. 우주는 워낙 넓어서 어디에다 기준점을 둘 수도 없으니 우주에 방향이 없다는 것은 수긍이 갈 것 같다. 태양, 또 다른 태양, 태양, 태양, 별, 또 다른 별, 별, 별, 별의 별 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우주의 별과 그 방향. 이렇게 보면 그야 말로 지구촌은 촌구석이다. 촌놈들이 주제에 뭘 안다고 맨날 싸움박질이나 하고, 무슨 철학과 사상이 있다고, 무슨 과학과 기술이 있다고 거드름 떨며 잘난 척하고, 원자력 불장난에 요격무기 배치 반대까지 지구 촌놈들 정말 정신이 있나 없나. 싸가지 없이 거들먹거리면서도 제 무덤을 파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
3시간을 금강 가 소나무 우드볼 필드에서 놀았다. 12코스를 충실히 다 답사했다. 넓고 긴 필드를 다 거닐고 나니 12시, 날씨는 아직 더워서 땀이 범벅이 되어 흐르고, 갈증은 나고, 몸이 지쳤다. 배가 고파온다. 홍난파의 가고파 노래를 배고파로 치환하여 부르고 싶다.
“내 고향 충청도서, 우드 볼을 치고 나니, 이제는 너도 나도 배고파라, 배고파, 가서, 얼른 가서 밥을 먹자, 밥을 먹어. 먹고, 먹고 나서 집에 가자, 집에 가 ♪.” 아까 아침에 권 교수가 준 쑥떡 하나 무화과 한 개로는 3시간을 버티기가 어렵다는 걸 절감했다. 그런데 공주 우드볼협회장께서 점심을 내겠다고 제안을 한다. 그 지도교수 덕분이다. 불청객인 우리 셋 까지 점심을 사준다고 하니 우리는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그렇다고 사양하고 따로 밥을 먹으로 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 우린 할 수없이 그 상황에 적응했다. 상황적응이론에 따른 거지 뭐. 금강이 바라보이는 갈비식당, 석판 갈비와 국밥으로 좋은 점심을 먹으며 거기다 공주 알밤막걸리까지 한잔 걸치니 곧 생체리듬이 살아난다. 알밤 막걸리는 노르스름한 색깔에 달콤한 맛, 정말 맛이 새롭고 좋다. 식후 덕담을 나누다가 일요일이라 차가 밀린다고 하여 우리는 곧 공주를 떠났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드라이버 권 교수는 졸음이 온다며 여러 가지 괴성을 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좀 불안했다. 졸음은 순간적으로 와 고개를 떨굴 수도 있는데, 곁눈질로 권 교수를 예의주시하며 수시로 말을 걸었다. 우리는 무사히 기흥 IC에 복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의 최종 임무는 선배교수를 집 앞까지 태워드리는 일. 기흥에서 수지까지 선배 교수를 안전하게 모셔드리고 집에 오니 오후 5시. 아까 선물 받은 공주 알밤막걸리를 한 잔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오늘 정말 좋은 체험 및 친교를 했다. Would you please play wood ball with me again in the near future? 2016. 9.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