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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문학과 학문

2016. 7. 4(월) 비

文學, 學文, 學問

살아가면서 가끔 우리가 쓰는 기초 단어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일 때가 있다. 오늘은 文學, 學文, 學問의 뜻이 궁금해졌다. 사전을 찾아보았다. 사전은 말뜻을 가르쳐주는 교수님이기 때문이다. 사전에서 문학(文學)이란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 학문(學文)이란 주역(周易), 서경(書經), 시경(詩經), 춘추(春秋), 예(禮), 악(樂) 등 시서육예(詩書六藝)를 배우는 것, 학문(學問)이란 지식을 배워서 익힘, 등으로 나왔다. 文學과 學文은 글자가 같고 순서만 달라 그게 그걸 것 같은데 사전의 구분은 달랐다. 문학은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 예술이고, 학문은 동양고전 중에서도 시서육예를 배우는 것이라고 한정했다. 그리고 학문은 포괄적으로 지식을 배워서 익히는 것이라고 나온다. 솔직히 나에게 와 닿는 풀이는 아니다.

내 생각에는 文學은 글을 배우는 것, 글을 배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현상을 글로 표현하는 것, 學文 역시 글을 배우는 것, 글을 배워 우리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 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한자의 뜻으로 보면 文學과 學文은 글자가 같다. 그 뜻을 좀 더 전개한다면 우리가 글을 배우는 목적은 우리 삶을 표현하고, 소통하고, 기록하여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데 있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사전에서는 學文의 역사적인 유래를 고려하여 뜻을 한정했겠지만. 또 學問은 배우고 의문을 가지는 것,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인문사회, 자연현상을 배우고, 질문하고, 발견하고, 창조하고, 소통함으로서 인류의 지식과 지혜를 넓혀가는 것, 쯤으로 푸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글을 배우는 것은 文學을 하는 것이고 學文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대학의 어문학전공자들이나 언론사 신춘문예에 등단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배우는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이다. 글을 얼마나 잘 쓰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니 우리 언중들이 위축될 필요는 전혀 없다. 누구든지 글을 배우고 글을 쓰다보면 글을 점점 더 잘 쓰게 되므로 위대한 문호도 될 가능성이 있다. 옛날의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시경과 서경을 쓴 수많은 무명작가들처럼.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은 전공 비전공을 따질 필요가 없다.

단어의 뜻을 알면 이렇게 우리는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을 수 있어 좋다. 나도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문학을 해왔고, 문학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문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문학을 할 수 있다는 것, 나이 들어서 이것만큼 큰 축복도 없는 것 같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문학과 학문을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學問도 그렇다. 누구든지 배우고, 묻고, 창조하는 일을 하면 학문을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든, 예술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기존의 지식을 배우고 의문을 제기하고, 선학들께 물어보고,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지속하면 학문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학문을 다 한 것은 아니다.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학문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 새로운 학문의 단계는 무궁무진하게 전개된다. 왜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은지, 학문 찾아 3만 리, 우리는 평생 학문의 여로에 있다. 학문은 대학교수들이나 전공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합리적인 방법론(methodology)만 알고 있다면 누구나 학문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학문을 하면서도 주의할 일은 지식위에 지혜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혜 없는 지식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지구촌에서 無智의 위험증거를 목도하고 있다.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호모 논(non)사피엔스 논(non)사피엔스로 변종되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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