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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컬럼

<엄마를 부탁해>를 부탁해

2016. 6. 18(토)

<엄마를 부탁해>를 부탁해.

한권의 책을 잃어버렸다. 서울 덕수궁 어디에선가다. 너는 지하철에서 그 책을 좀 읽으면서 서울시청 역으로 갔다. 너는 책을 읽을 때 언제나 빨간 펜을 지참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책의 내용에 다소 절묘한 표현이나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방언들, 어떤 장면, 장면의 등장인물에 대한 상상 등을 여백에 더러 써놓곤 한다. 네가 덕수궁 이중섭 특별전 입장권을 살 때 그 책을 매표대 옆에 내려놓고 그냥 궁으로 들어 간 건지, 아니면 덕수궁현대미술관 매점에서 3만원 주고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도록을 살 때 그 곳에 내려놓고 그냥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네가 너의 행동의 시퀀스를 즉시즉시 알아차린다면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텐데, 네가 뭘 잃어버렸다고 인지할 즈음에는 이미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너는 나이가 耳順이 넘어서 그런지 요즘 들어 부쩍 뭘 잘 잊고, 잃는다. 몇 달 전엔 비싼 안경을 잃어버렸다. 그 때도 기억이 깜깜했을 뿐 아니라 아무한테서도 안경을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았었다. 너는 번번이 무엇을 늦게 알아차리고 아쉬워한다. 너는 그 책을 천으로 된 예쁜 책케이스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지하철에서 읽었었다. 요즘에는 스마트폰 때문에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너라도 지하철에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가지고 말이지.

너는 최근 맨부커상에 빛나는 <채식주의자>를 읽고 마치 네가 소설가가 된 것처럼 인간의 본성 내지 근본 문제를 생각하며 업(up)이 되어있는데, 그래서 너의 책꽂이에서 잠자고 있던 <엄마를 부탁해>를 꺼내 읽으며 몰입하던 중이었는데, 책과 케이스를 몽땅 잃어버렸다. 아이 참, 방법이 없네, <엄마를 부탁해>처럼 잃어버린 책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만들어 뿌릴 수도 없고, 그래서 너는 마음을 크게 가지기로 했다.

이 세상에 너의 소유는 없어. 아버지, 엄마, 마누라, 누이, 선생님, 아니 어떤 스승이라도, 아니 몇 십 년 지나면 너도 네가 아니게 될 거야. 그러니 모든 것을 용서해. 그 책을 누군가가 가져다가 재미나게 읽는다면 그게 더 좋은 일일 수 있어. 말하자면 독서를 권장하는 일에 종사하는 너의 본연의 일을 한 거야. 그러니 그 책을 가져간 사람에게 그 책을 잘 읽고, 멋진 삶을 살아가길 부탁해.

아참, 그런데 며칠 전에 김포 한강신도시 사는 현수형이 세종시로 이사를 가신다며 너에게 준 100여권의 책 가운데 그 책이 보이더라. 너는 그 책을 읽으면 되겠다. 야훠! 고마워요, 현수형. 다음에 세종시로 꼭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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