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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컬럼

국회도서관 60년 1

 

1. 우리나라 도서관의 역사적 전개

우리 도서관의 역사를 일별해볼 때 우리는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도 먼저 책을 잘 만들어 활용, 유통하고 교육기관과 도서관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노력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태학(太學)과 경당(扃堂), 백제의 책암(冊巖)운용과 일본에의 서적전파, 신라의 국학(國學)과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등 독서의 장려는 우리 고대문화를 선진적으로 이끌어 준 원동력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直指心體要節>을 인쇄했고, 두 차례에 걸쳐 방대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을 제작하여 불경을 찍어냈으며, 국자감(國子監)이라는 교육기관을 두고 비서성, 수서원, 문덕전 등 실로 다양한 서적 보존 및 활용기관을 운용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고아(高雅)하고 화려(華麗)한 고려문화(高麗文化)의 꽃을 피웠다.

조선조에 와서는 주자소와 간경도감(刊經都監)의 운영으로 인쇄문화의 기틀을 잡았고, 우리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백성의 문맹퇴치에 노력하였다. 또 춘추관(春秋館)을 비롯한 사대사고(四大史庫)를 설치하여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보존하였으며, 성균관(成均館)과 그 부속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두어 교육과 연구에 활용하였다. 또 전국 각 지에 서원(書院), 향교(鄕校) 등 교육기관과 그 문고를 운용함으로써 문명국으로서의 조선의 튼튼한 기반과 위상을 확고히 형성하여 왔다.

그러나 개화기에 조선이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 외부 세력이 침탈함으로써 대 혼란이 일어났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로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되었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과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일본의 식민지 강제지배를 받게 되면서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가 일본의 군국주의에 짓밟히게 되었다. 사대사고, 규장각, 서원, 향교 등 조선의 도서관은 약탈되거나 파괴되었고, 그 속에 보존되어온 책들도 여지없이 흩어지게 되었다. 도서관은 일제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만 운영되었다. 예를 들면 조선총독부도서관이나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등은 그들을 위한 도서관이지 우리 백성을 위한 도서관이 아니었다.

36년간 겨울잠을 자야 했던 우리나라 도서관의 싹은 1945년 해방이 되어서도 바로 깨어나지 못하였다. 3년간의 미군정 시기를 거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1950년 다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6.25전쟁에 휘말리면서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1948년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인수하여 국립도서관을 개관했지만 미처 체계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해야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국립중앙도서관은 조선 최고의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의 전통을 이어받지 못하였다. 이는 경성제국대학을 인수한 서울대학교가 조선의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지 못한 것과도 공통된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침투한 그들의 언어, 교육, 문화는 우리 고유의 자생적 언어, 교육, 문화를 우리의 것으로 현대화하는 데 기형적으로 작용해 왔다. 따라서 우리 도서관의 세계화도 그만큼 늦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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