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욕’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욕은 ‘목욕’이다. 목욕을 하면 몸이 날아갈 듯 상쾌하다. 그 다음 가장 새로운 욕은 ‘뉴욕’이라고들 말한다. 뉴욕은 지명이라 욕의 계열이 좀 다르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발음으로만 보면 ‘욕’이다. 그것도 아주 좋은 욕이고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욕이다. 20세기부터 세계 문명의 중심도시로 우뚝 서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좋은 욕이 있으니 초등학교나 중학교 동창을 만났을 때 첫 번째로 튀어나오는 욕이다. 예를 들면 “야이, C-bal 오래간만이다.” 또는 “네 요년들, 어디 갔다 인제 나타 나냐.” 등이다.
우리는 욕을 하면 안 된다고 배워왔고 실제로 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평소 직장생활에서 아랫사람을 부를 때 “야, 이 새끼야. 이걸 일이라고 하냐?” 라고 했다고 하자.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또 상사에게 다가가서 “C-bal 그걸 업무라고 지시하오?” 라고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런 사람은 그 직장에서 더 이상 배겨내지 못할 것이다. 인간관계와 위계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등이든 중등이든(고등학교와 대학은 좀 다를 것이다) 어릴 적 동창을 만나면 이놈, 저놈, 이년, 저년 하는 것이 오히려 정겨우니 어찌된 일인가. 심지어는 ‘미친놈’, ‘미친년’이라고 해도 듣기에 거북하지 않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이때는 “아이구, 아무개씨 오래간만이여요.” “그간 어떻게 지냈어요?” 하고 정색을 하고 물으면 거리감이 생기고 계면쩍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동창인 경우는 다짜고짜 육두문자가 나와야 오히려 거리감이 없다.
욕뿐만이 아니다. 재미있는 별명도 많아서 생각나는 대로 별명을 내 지껄인다. ‘왕땅개’, ‘대꼬바리’, ‘맹꽁이’, ‘색시’, ‘송아지’ 등 별명도 많다. “어이 왕땅개, 오랜만여.”, “야, 이쉑끼, 맹꽁이 아냐.” “어이 송아지, 지금 어디 사냐?” 이렇게 말해도 그저 반갑다고 웃고, 좋다고 얼싸안는다. 그리고 할 술 더 떠 선생님의 별명까지 부르며 “야, 그 껕보리 선생님 어디 계시는지 알어?” “아 껕보리? 지금 중촌중학교 계신대. 아마 교감선생이라지.” 하며 맞장구를 친다.
동창끼리는 30대든 60대든 모두 예의범절을 내려놓고 한 두 시간 욕과 별명을 섞어가며 떠들다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그래도 헤어질 땐 아쉬워서 안달이다. “그래 잘 가.” “또 만나.” “전화하구” “연락해.” “응, 애들 결혼할 때 꼭 연락하고.” “어이 송아지 잘 가라.” “지랄하네, 작것들”......하며 손을 흔든다.
어제(2008.8.17)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여자동창이 다섯 명인데 남자는 나 한명이었다. 계면쩍었다. 욕이 나오지 않았다. 원래 점잔해서(?) 욕을 잘 못하지만 여자동창을 만나니 더욱 쑥스러웠다. 내가 만일 그 여자동창들 한태 “네, 요년들” 하고 불렀으면 그들이 뭐라고 할까? 속으로 상상하며 혼자 웃었다. 그리고는 꼼짝 없이 정중하게 앉아 있다가 조용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했다. 욕은 동창끼리 하면 반가운 것이지만 동성끼리만 하는 것이고, 이성간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껴보았다. “그래 동창들 반가웠어. 잘 살고, 잘 지내. 그리고 모임 때 또 얼굴 보자고.”(2008.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