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혼자 살다 보니 보통 하루에 한 끼는 사 먹는데 요즘은 코로나를 핑계로 거의 집에서 밥을 해 먹습니다. 좋은 쌀에 찰보리 쌀, 고구마, 또는 옥수수알을 까 넣고 전기솥에 명령하면 맛있는 밥을 지어줍니다. 그런데 전기솥에 녹음된 음성이 좀 어색합니다. 솥에 쌀을 씻어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르면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이러거든요. ‘맛있는 취사’라, 취사는 밥을 짓는 동작언어인데, 밥을 짓는 동작이 맛있다? 어색한 거 같아요. 국어사전에 보면 “취사(炊事): 끼니로 먹을 음식 따위를 마련하는 것을 이름”, 이렇게 나오지요. 음식을 마련하는 일이 재미있을 수는 있어도 그 행위가 맛이 있는 건 아닌데요, 하지만 이 문제로 밥솥 회사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일상에서 어법에 맞지 않게 쓰는 게 한두 가지도 아니고, 네가 국어학자도 아닌데 나서보았자 별 호응도 없을 것 같고요.
이 글은 사실 밥솥의 음성녹음을 문제 삼으려 한 게 아니고 콩나물의 기능과 역할을 재미 삼아 생각해 보려고 시작했습니다. 요즘 슈퍼마켓에 가면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먹거리가 많은데, 어제는 콩나물과 포장 사골곰탕을 샀습니다. 콩나물은 1,200원, 1인용 곰탕은 1,500원 정도, 저렴합니다. 집에 와서 콩나물을 삶아 그대로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2~3일 먹을 분량이라 먹을 때마다 꺼내 양념을 넣어 먹으려고요. 예전엔 콩나물을 사서 한번 먹고 남은 건 거의 다 버렸는데, 이제 요령이 생겼습니다. 삶아서 끓이거나 무치지 않은 상태로 두면 먹을 때마다 적정량을 덜어 무치거나 비벼 먹을 수도 있거든요.
예전에 어머니 계실 때는 콩나물을 집에서 길러 먹었습니다. 특히 겨울에는 방 윗목에 콩나물시루를 설치해두고 콩나물을 수경재배했는데요. 그 수경재배는 아마 방안에 습도를 조절하는 기능도 했을 것 같아요. 콩나물이 좀 길면 몇 줌 뽑아서 삶아 무쳐 먹기도 하고, 콩나물밥을 해서 무 생채를 넣고 쓱쓱 비벼 먹었지요. 아버지만 따로 밥을 떠드리고 엄마와 누나와 나는 한 양푼에 비벼 같이 먹었는데 맛이 일품이었어요. 하하. 지금은 재배하지 않아도 언제든 좋은 콩나물을 살 수 있어 좋은데, 그래도 콩나물의 진짜 맛을 느끼기에는 2%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콩나물은 음악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서양에서는 음표(音標)를 musical note라고 한다는데 우리는 음표의 모양이 콩나물처럼 생겨서 콩나물 대가리라고 하네요. 또 국어사전을 봅니다. “콩나물 대가리: ‘음표’를 낮잡아 이르는 말.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 데서 유추하여 이르는 말, 콩나물의 머리 부분. 콩나물 뿌리를 틔우는 콩 부분” 또 대가리도 찾아봅니다. “대가리: 동물의 머리를 이르는 말, 사람의 머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 길쭉하게 생긴 사물의 앞부분이나 꼭대기를 이르는 말,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것을 낮잡아 이르는 뜻을 더하여 명사를 만드는 말”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도 ‘대가리’는 좀 우습죠? 소머리 국밥도 ‘소 대가리 국밥’이라고 하지 않는데, 왜 콩나물은 대가리라고 하는지 원, 그런데 습관이 되어 그런지 음표를 콩나물 머리라고 하면 익숙하지는 않죠? 그냥 ‘콩나물 음표’라고 쓰면 또 모를까? 하하. 그런데 우리 말은 정말 절묘해요. 모든 현상과 사물에 그때그때 다른 적절한 표현이 참 많습니다. 예전에 회사에서 어떤 선배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똥 대가리 같은 놈들” 하하. 이 표현은 무엇을, 누구를 낮잡아 부르는 걸까요? 2020.12.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