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학교
는 1950년대에 개교한 시골 중학교입니다. 그 학교의 이름은 계명(雞鳴)중학교, 영어로 번역해 보면 Cock-a-Doodle-doo Middle School입니다. ‘닭 외침’ 중학교, 시계 알람이 없던 당시 새벽에 닭이 울면 만물이 깨어나듯, 세상을 깨우는 인재를 기르는 중학교라는 위대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 학교는 계룡산 아래 신도안에 있었는데요, 사립중학교였습니다. 전교생은 180명, 많을 때는 300명 정도 되는 작은 학교였어요. 어찌 보면 소수정예 학교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서 교육하는 학교가 아니라 1960년대 가난한 시골 아이들을 받아준 보통 평등의 남녀공학 중학교였습니다.
너는 중학교에 다닐 수 없는 가난한 집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입학시험을 봤습니다. 시험이라기보다는 형식적인 입학절차였는데 너는 겨우 15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입학금을 내고 일본 순사 옷 같은 교복을 입고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입학 후 분기마다 내야 하는 월사금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일주일에 한 번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독촉을 받았습니다. 언제 낼 수 있냐? 아버지는 뭐 하시냐? 수확하면 낼 수 있니? 등 네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1년, 선생님이 너에게 수업료를 독촉하지 않으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수업료를 면제해 주셨던 것입니다. 부모님과 상담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사립중학교라 이런 일이 가능했나 봅니다. 교장 선생님의 재량권이 공립보다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술을 잘 드시기로 유명했는데, 그래서 학교에서의 수업이나 교육행정보다는 지역사회 인간관계를 하시느라 바쁘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주류(酒類) 활동의 외연은 대전, 논산, 연산, 두계, 하하. 일주일에 한두 번은 대전이나 논산에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 시골 가난한 집 학생들을 공부할 수 있게 많이 배려해 주셨습니다. 공부는 썩 잘하지 못해도 어려운 집 아이들에게 장학혜택을 많이 주셨습니다. 너 말고도 수업료 면제를 받은 친구는 한 반에 다섯 명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학혜택의 기준은 성적보다는 가난이었습니다. 물론 성적도 중간 이상은 되어야 했지만.
한 학년에 60여 명, 많을 때는 120여 명, 정말 소규모였는데요, 학생들이 순진하고 티가 없어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도 제법 열심히 했습니다. 너도 반에서 3등, 4등을 번갈아 하는 제법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대전고, 대전여고, 충남고, 대전 상고, 대전 공전, 보문고 등에 합격하는 학생이 1년에 10명 이상 나왔습니다. 논산, 서울, 인천 등에 가서 고등학교에 입학한 친구들도 10여 명 정도 나왔습니다. 그들은 각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충남대, 육사에 진학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다 계명중학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배움이 절실했던 그때 그 친구들, 그런데 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성적은 그런대로 좋았지만, 집에서 고등학교에 보낼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지요.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대전 모 공업고등학교 장학생시험을 보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래 3년간 학비 전액을 면제해 주는 그 시험에 합격했지만, 가보니 공업학교가 너의 적성에 맞지 않고, 경제적으로 통학도 자취도 어려워 3개월 다니다 자퇴했습니다. 그래서 너의 정규학교 학창 생활은 1967년 5월에 소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 후엔 독학입니다. 독학은 오래 걸립니다. 아니 평생 해야 합니다. 중학교 졸업 후 무려 7년 만에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매번 수학 때문에 떨어지다가 1973년 시험에서 겨우 수학에서 과락을 면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수학 점수가 40점인데 평균점수는 73점, 다른 과목은 80점 이상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실망하지 않고 수학 빼고 계속 공부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였지요. 국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3년 동안 전화국 공무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공무원보다 월급이 많은 공기업 시험에 합격하여 21년간 공기업에 근무했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먹고살기? 정말 너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다니면서 계속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효율성은 적었습니다. 효과는 매우 더디게 다가왔습니다. 독학을 도와주는 방송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도 졸업하고 박사학위도 받았습니다. 중학교 시절 너의 꿈은 영어 교사, 아나운서, 대학교수, 하하. 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으니 모교에서 강의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전임 교수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부조리가 심한 사회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전임교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전임은 못 되었지만 20여 년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주셨습니다. 지금 70입니다. 지금도 평생교육원에서 강의하고, 책을 쓰며 인생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혼자 살아도 행복합니다. 만일 그때 그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내 생애 최고의 학교는 문명의 다리를 놓아주고, 힘차게 우리를 일깨워준 그 중학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 나의 사랑하는 계명(雞鳴)이여! 교가는 이러합니다.
높이 솟은 계룡산 정기를 뻗어/무궁화 꽃송이에 배움터 잡은
우리는 슬기로운 힘찬 새 일꾼/한밭과 논멧 들 발 바탕 디뎌
오대양 육대주에 날으고 뛰어 /세차게 나아가자 계명중 건아
2020.2.27.(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