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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봄의 냇가에서

봄의 냇가에서

지난 주말(2019.12.21-22) 춘천에 다녀왔습니다. 춘천(春川)을 직역하면 ‘봄내’입니다. 그래서 봄의 냇가에 다녀온 셈입니다. 12월 20날 금요일 ‘위례 라디오’ 송년 모임에서 포도주, 피자, 성심당 빵으로 1년간 함께 한 라디오 요원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 막 출간한 너의 신간 『귀향본능』을 받아 내지에 “신년에 행복하시라(Happy New Year)”고 써서 라디오 회원들께 1권씩 선물했습니다. 너의 책이지만 디자인이 맘에 드네요.

위례에서 밤 10시에 출발하여 자정 무렵 영등포 아들네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들, 며느리, 손주 집에서 편안한 밤을 보내고 아침에 손주를 안아보았습니다. 전날 너무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손주가 자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침에 상쾌한 인사를 했지요. 하하. 며느리가 친정아버지, 시아버지 공통으로 준비했다며 두툼한 겨울 겉옷을 선물하네요. 상표 이름은 LIFE, 즉 생명입니다. 너는 ‘함박꽃’을 피웠습니다. 원래 함박꽃은 봄에 피는 법인데 너는 겨울에도 이렇게 함박꽃을 피울 수 있네요. 아침 잘 먹고 손주와 실컷 놀고, 11시에 아들 집을 나서 7호선 건대역, 건국대 도서관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춘천 가는 전세버스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너는 춘천에는 자주 가지 못했습니다. 89~90년 울진에 근무할 때, 아니면 닭갈비 먹으러 엉겁결에 간 적은 있지만, 그땐 그냥 지나치거나 잠깐 들른 것뿐이지요. 아, 2년 전에 김유정문학촌과 그 인근에 있는 사립 ‘책과 인쇄’ 박물관엔 가보았는데요, 그곳은 춘천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지요. 그런데 올해 성균관대학교 교육원 총동문회가 송년 모임 장소를 춘천으로 정하는 바람에 춘천에서 하룻밤 자며 春川(봄내)의 봄 내음을 맛볼 좋은 기회를 맞았습니다. 동문 여러분께 2018년 3월에 간행한 상업성 없는 너의 책, 너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책 『너는 인문학 도서관에 산다』 100권을 기증할 좋은 기회도 생겼지요.

탑승 2시간 후 버스는 춘천 세종호텔에 도착합니다. 강원의 수도 춘천, 제법 높은 건물과 아파트가 운집해 있는데요, 우리들의 숙소 세종호텔은 고즈넉한 작은 산 아래 아담하게 앉아있네요. 3층의 깔끔한 건물, 그래도 승강기가 있는 편리한 건물, 10층 이상의 고층보다 10층 이하 1층을 더 선호하는 너로서는 참 좋은 집입니다. 호텔에 왜 세종의 이름을 썼는지 시비를 걸 필요는 없습니다. 세종이 좋아서 그랬겠죠. 하하. 저층 건물, 사람은 땅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기에 안전을 피부로 느끼며 주위를 둘러봅니다. 싸한 겨울 산 공기가 마치 너의 고향처럼 들어와 가슴이 후련합니다. 잠시 온돌방에 여장을 풀고 쉬다 6시에 연회에 참석합니다. 사회자께서 너에게 원래 프로그램에 없던 “격려사”를 해달라고 부탁하네요. 너는 극구 사양했습니다. 의례적인 격려사는 전 회장 한 분이면 됐지, 자네가 덤으로 나서는 것은 어색하고, 또 오늘 변변하지 못한 책을 기증하는 사람으로서 예정에 없던 격려사를 한다는 것은 어딘지 좀 속 보이는 일 같아서요. 하하. 사회자한테는 미안했지만, 그래도 너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어요. 하하. 공식 행사 후엔 호텔식 저녁 식사, 그리고 딴따라 유흥, 너는 식사 말고는 전공이 아니라 어색합니다. 차라리 우쿨렐레를 연주할 기회가 있다면, 내년엔 우쿨렐레를 가져와 연주해 볼까 상상하며 숙소에 들어왔습니다. 원로 4명이 함께 써야 하는 온돌방, 그중에 막내인 너는 잠시 그 방을 나와 인지도가 높은 다른 분들과 술잔을 나누었습니다. 1시간 후 불 꺼진 그 방에 다시 들어와 머리 방향을 다른 분들과는 반대로 두고 그렇게 평화로운 춘천의 밤을 보냈습니다.

5시에 잠이 깼습니다. 다른 분들은 쿨쿨 자며 기상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노인은 대개 일찍 일어나는 법인데, 너 빼고 이 방 노인들은 하나같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네요. 네가 스마트폰 광명을 열람하고 있으니 드디어 한 분이 물어봅니다. “지금 몇 신가?” 그래서 “여섯 시요.” 했는데도 그때부터 또 30분이 지나서야 세분 어르신들이 일어나네요. 단 밥 단잠을 실천하는 건강한 어르신들입니다. 그 새벽 너는 밖으로 나와 호텔 주변을 좀 걸어보았습니다. 전기 나무 덤불 불꽃이 흐드러진 주차장, 호텔 뒷산에 북두칠성처럼 배치한 전깃불이 이채롭습니다. 인공이 자연을 모방했네요. 추워서 그런지 풀벌레 소리는 나지 않습니다. 고양이 식 세수를 하고 호텔 아침을 먹습니다. 곰탕인데 맛도 좋고 서비스도 좋고, 그런데 남자 종업원이 밀(meal) 트럭으로 밀고 온 뜨거운 곰탕 국그릇을 앳된 여종업원이 손님 앞에 놓아주네요. 이것도 고객의 기분을 배려한 호텔 측의 기내식(kinesics)인지, 아니면 남존여비가 아직 잔존 해 있는 건지, 원. 좀 안쓰럽네요.

우린 기념사진을 찍고 김유정 문학촌으로 향합니다. 먼저 들른 곳은 ‘책과 인쇄’ 박물관, 사서들이라 그런지 관심도가 제법 높은 것 같습니다. 빵모자를 쓰신 한 선배님은 책을 우러러 책꽂이를 어루만집니다. 그 모습이 마치 시인 같습니다. 사서들은 늙어도 책을 사랑한다는 걸 정말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너는 이 박물관을 2년 전에 혼자 관람했기에 다 아는 척 따라다녔는데요, 그런데 오늘 그림이 있는 천자문 고서를 발견했습니다. 글자가 천자, 그림이 천 개, 정말 좋은 도서(圖書)입니다. 한자의 의미 파악에 참 좋을 것 같아 한 부 구하고 싶어 주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책이 유일본이며 영인본이 없다네요. 그런 좋은 책은 복사해서 보급하면 어디 덫 나나? 전시만 하면 뭐해요, 활용해야지, 활용을.

아쉬움을 뒤로하며 김유정 문학촌은 건성으로 즐기며 다시 버스를 탔습니다. 12시 반 버스는 남양주 장작불 곰탕집에 도착합니다. 우린 1만 원 하는 진짜 곰탕을 먹었습니다. 1박 2일 몸을 보신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며, 춘천 ‘봄의 시내’에서 2020년 새봄을 준비합니다. 우리 사서들의 마음에도 2020의 희망이 피어납니다. 겨울이지만 봄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여유와 희망,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까요? 며느리가 선물해준 LIFE 외투, 생명의 외투 깃을 단단히 여미고, 행운권 추첨으로 받은 신세계 상품권 2만 원을 봉투에서 빼내 지갑에 넣고, 대전행 무궁화호를 탔습니다. 표를 예매하지 않아 입석이지만, 천안서부터는 카페 칸에서 편히 쉬며 앉아왔습니다. 집에 오니 9시, 아들에게 잘 왔다고 전화하고, 햅쌀로 밥을 해서 맛있게도 냠냠. 2019.12.2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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