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답사 장성 필암서원
다시 버스를 타고 고창읍으로 이동했다. 고창읍에는 제법 큰 마트와 식당들이 있었다. 12시가 좀 넘었는데 우리는 홀이 아주 넓은 ‘본가’라는 식당(대표 윤은석, 전화 063-564-5888)에서 맛있는 별미죽을 먹었다. 규장각 인솔 팀이 사전 예약해 놓은 메뉴다. 품목은 백합죽, 통상 죽이라 하면 별 영양가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요즘은 죽이 고급 메뉴에 든다. 그래서 죽 값도 만만하지 않다. 메뉴판을 보니 백합죽은 1인당 1만 3천원. 처음 먹어보는 죽인데 백합은 조개의 일종이라 한다. really? or lily? 죽을 먹기 전 백합조개와 오이를 섞은 백합 회 무침이 나왔다. 색 다른 느낌, 감칠맛이 났다. 따스한 조개국물도 맛보았다. 백합조개 하나로 회 무침과 국물, 그리고 부드러운 쌀죽까지 백합 향기 그윽한 남도음식을 먹으니 소화도 잘될 것 같고 기분도 좋아 다시 한 번 남도음식의 멋과 맛을 신뢰하게 되었다. 함포고복, 커피까지 걸치고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에는 대형 하나로 마트가 있었다. 일행들은 마트에 들러 저마다 물건을 사기 시작했다. 너는 900원 짜리 복분자주 샘플 3병을 사 바랑에 넣었다. 샘플인데 왜 돈을 받지. 하하. 그냥 주는 게 샘플 아닌가? 화장품 샘플은 그냥 주던데. 하하. 하지만 샘플 병이 앙증맞고 예쁘게 생겼다. 버스 좌석 짝꿍인 해바라기 씨 할머니는 복분자주 샘플을 10병이나 샀다. 병이 예뻐서 병 모으기 운동의 일환으로 산다고 했다. 아마 그 할머니 집에는 올망졸망한 잡동사니들이 가득할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밖에 나오니 길 건너 잔디 밭 키 작은 벚꽃나무에 꽃이 피었다. 이 벗(벚)들은 가을을 봄으로 착각했나보다. 하하. 봄엔 어쩌려고, 지금 10월에 꽃을 피우나, 저러다 버찌 씨앗 기능을 잃지는 않을까. 꽃이 씨 기능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꽃이 식물의 생식기라는데. 하하. 웃을 일이 아니네.
점심 후 버스는 굽이굽이 산을 넘었다. S자 굴곡이 장난이 아니다. 몸이 좌로 우로 쏠리기를 여러 차례, 그래도 덩치 큰 버스는 힘이 좋아 잘도 넘는다. 어느 새 고개를 넘었다. 전라북도에서 전라남도로 월경을 하는데 그 월경 값으로 준령이 텃세를 하나보다. 아마 노령산맥? 호남평야지대라 준령은 다소 의외다. 하지만 북도와 남도의 기후를 바꿀 만큼 큰 준령은 아니다.
필암서원(筆巖書院)에 이르렀다. 붓 필筆, 바위 암巖, 이곳의 지명이 저 앞산에 있는 붓처럼 생긴 바위로 인해 필암이 되었다고 한다. 필암서원은 김인후(1510-1560)의 고향, 김인후는 네가 중학교 시절에도 들어본 귀에 익은 인물이다. 그는 조선 중종 5년(1510)에 나서 명종 5(1560)년에 몰했다니 불과 50년을 살다간 인물인데 업적은 범상하지 않다. 사전을 찾아보니 김인후는 전남 장성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라고 나온다. 예전 분들은 웬 이름이 저리 많은지, 본명과 필명 하나면 됐지, 무슨 자네, 호네, 번거롭다. 이것도 다 어떤 인물의 이상적 삶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을까? 그렇다면 김인후가 어릴 때 사용한 자字 후지厚之는 장차 후덕厚德한 인물이 되라는 의미? 커서의 명칭 호號 하서河西는 섬진강 서쪽에 사는 사람? 그런데 담재湛齋는 또 뭘까? 맑을 담湛, 단정할 재齋, 맑고 단정한 사람? 한자에 따라 너대로 해석한 것이지만 그럴 듯 해 보인다.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평생 어떤 바람직한 특색 있는 인물로 살고자 한 옛 사람들의 이상적 정신, 그리고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가? 요즘 사람들은 자기 이름의 의미와 특성을 잘 모르고, 그래서 삶을 별 생각 없이 살고, 그래서 명분을 지킨다는 말이 뭔지 숙고하지 않는데 예전사람들은 일생에 이름값을 다하는 명분 있는 삶을 매우 중요시했다. 이런 점에서는 옛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더 현명했던 것 같다. 너도 법정스님을 패러디한 너의 호, 법종法鐘, 그리고 도림스님이 지어준 법명, 혜공慧空을 다시 마음에 새기고 여생을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보다.
장성군청에서 나왔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사투리가 약간 더 두드러진다. 아하, 이게 북도와 남도의 차이로군. 전시관에 들어가서 김인후의 학문과 행적을 살펴보았다. 우선 필암서원 안내 브로슈어에는 김인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 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1945년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장성에 들어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정진하였다.
전시관을 주마간산하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유리상자 속에 책과 목판 등이 제법 있었다. 김인후의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외 시문집(詩文集) 10여권이 있다고 한다. 철학자이면서 문인이었던 셈. 그리고 홍문관과 성균관에 근무한 교수 겸 사서였던 것 같다. 성균관에서 전적典籍이라는 직을 역임했다니.
전시관을 나와 서원을 둘러보니 역시 예전의 지방대학 같은 느낌, 서원 안에는 도서관격인 장판각이 남아있다. 작은 건물이지만 마치 해인사 수다라 장경판전 처럼 바람이 통하도록 창문이 나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과 다른 점은 창문이 상하로 있지 않고 아래 부분만 있다는 것이다. 판전의 규모가 작아서 그랬을까? 찬바람과 더운 바람이 순환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들여다보니 선반에 목판이 책처럼 빼곡히 꽂혀 있다. 와, 목판을 여기서도 보네.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지금 목판 특별전을 하고 있는데, 그리고 너는 이번 동계 계절 학기에 서지학 강의를 맡았는데 이런 실물 목판들을 두루 볼 수 있다니 너에겐 참 행운이로고. 내친 김에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도 가보고 싶네.
장성군에서 나온 문화 해설자는 설명을 마치며 김인후의 시조를 음악성을 배제한 채 마치 음치처럼 읊어보였다. 하하.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절로
이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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