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도서관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런데 너는 이런 제목들을 패러디하고 싶은 충동을 더러 느낀다. “노인과 바다” 대신에 “노인과 도서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대신에 “누구를 위하여 방귀를 끼나” 등등. 다 웃자고 하는 말.
그런데 오늘 오전 공공도서관에 가보니 노인천지였다. 정말 고령사회가 온 것을 실감하겠다. 전철이 노인 천지인 것은 진작 알았는데, 이제는 도서관도 노인천지라니, 참 씁쓸하다. 노인이 도서관을 활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네 말은 도서관에 젊은 청춘이 많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는 거다.
도서관이 공부방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들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도서관은 원래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 태어났다. 다만 우리나라 도서관들은 좀 기형적이라 효율적인 학습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고, 학생들에게 자기 책을 못 가져오게 하고 도서관 책만 보라하면서 오히려 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하는 기현상을 노정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도서관에서 책 두 권을 빌렸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읽을 기분은 아니다. 그 우중충한 분위기, 낡고 늙은 도서관에 머무를 마음이 나지 않았다. 너도 노인이지만 어쩐지 그 노인 속으로 합류하고 싶지 않은 이상한 외골수, 노인이지만 쾌적하고 싶고, 새 패션을 착용하고 싶고, 젊은 글을 쓰고 싶은 충동으로 도서관에 머물고 싶지 않은 이상한 자질을 가진 너.
도서관의 쾌적한 공간에서 청춘들이 취업과는 무관하게 본인의 자유학문을 추구할 수 있다면 너도 그 속에 기꺼이 합류할 것이다. 그러나 칙칙하고 냉기 흐르는 그 공간에서, 대화 없이 삭막한 그 공간에서, 속 알머리 백발을 드러내며, 저승꽃을 보여주며 외로이 앉아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도서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노인과 도서관’은 인정하지만 도서관의 근본적 존재이유는 청춘을 깨우는데 있고, 평생교육에 있고, 문화 창달에 있다는 것을 이육사처럼 소리 없이 아우성치며 오늘도 저 우중충하게 ‘갑질’하는 공공도서관을 떠난다. 그래서 너는 너대로 도서관을 열었다. 오늘 월세를 냈다. 2017.2.1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