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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벌초

벌초伐草

음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동시에 벌초伐草의 계절이다. 벌초는 조상의 묘에 자라난 풀을 깎고 다듬는 일로 예로부터 매우 중요한 연중행사로 이어져 왔다. 이는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묘지문화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체 인간은 시간 제한적 존재이므로 생명의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따라서 누구나 주어진 생명을 다하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살아 있는 어린 후손에게는 슬픔, 아쉬움, 존경, 그리움으로 남아, 한 줌 조상의 흙을 보살피려는 착한 유전자를 내려 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아이티(IT) 문명시대가 되고 보니 모든 문화 풍속도가 바뀌고 있다. 장례문화도 이제 다양해져서 매장이 줄고 화장이 늘었다. 상가 집에 문상을 가보면 요즘은 대개 화장이라 한다. 우리 집안의 경우도 내가 어릴 때는 철저한 유가적 전통에 따라 매장을 고수하며 일 년에 다섯 번 정도(설, 한식, 벌초, 추석, 묘사) 조상의 묘를 돌보는 일이 효행의 기본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스피드시대라 비현실적이고 형식에만 그치는 거추장스러운 문화를 정비하고 간편하고 실속 있는 문화로 개선해가고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벌초를 하지 않는다. 48년이 지난 선친의 묘는 파서 화장을 했고, 어머니의 묘는 공원에 있어 관리를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전에는 끔찍하고 무섭게 생각하던 그 화장을 지금은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기왕에 흙으로 갈 거 스피디하게 가면 장기간 부패를 방지할 수 있어 좋고, 후손에게 벌초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아, 벌 쏘임을 예방할 수 있어 좋고, 고속도로에 교통체증을 일으키지 않아 좋고, 좋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납골당도 반대한다. 죽어서 까지 답답한 아파트에 살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향기 없는 조화에 둘러싸여, 딱딱한 철골 구조 속에, 그 속에 또 옹기 단지 속에 왜 그렇게 허구한 날 갇혀 있어야 하는가? 흙은 흙으로 보낼 때 자유롭다. 물고기는 물로 보내야 하듯, 흙은 흙으로 보내야 한다. 흙에게 흙은 지옥이 아니라 극락이다. 흙이 있어야 하늘도 있고 하늘이 있어야 흙도 있다. 미심쩍으면 저 우주를 보라. 2016. 9.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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