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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그리운 대화님

2016. 6. 11(토)

그리운 대화님

오늘 지하철을 타고 예술의 전당을 오가며 떠오른 글 제목은 ‘그리운 대화님’, ‘맞아, 그 생각을 못 했네’, ‘나대로 독서법’ 이렇게 세 가지다. 이상하게도 필기구가 제대로 없을 때는 엉뚱한 생각이 더 잘 떠오른다. 그러다가 집에 와서 글을 쓰려고 들면 많은 아이디어들이 지워져 버렸다. 내 머리 바이오칩은 디지털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생각에도 청개구리 근성이 있기 때문인지, 원. 스마트폰에 메모해둔 몇 글자로 지금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는 데 얼마나 적절한 분량으로 생각을 이어갈 수 있을지 내 마음 나도 모른다.

 

수서역에서 전철을 타기 전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노인들이 수두룩이 집결해 있는 벤치 쉼터에 앉아 한 모금을 마시고 있는데, 한 칠십 쯤 돼 보이는 할머니 한분이 말을 걸어왔다. 오늘 비 온다고 했나요?, 내가 우산을 들고 있으니까 물어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그 할머니는 약간 시비조로 오믄 오고 안 오믄 안온다고 해야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하고 중얼 거렸다. 나는 그냥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또 2차 주제가 나왔다. 커피에 관한 것이었다. 박사들이 텔레비전에서 커피가 몸에 안 좋다고 해서 안 먹었는디, 그 다미 또 박사들이 나와서 하루에 두 세잔은 몸에 좋다고 해서 또 먹어. 어떤 게 맞는 건지, 원... 그 할머니도 대화가 그리웠던 거라고 생각하며 네 그래요, 조금 먹는 거는 몸에 좋대요. 할머니 잘 쉬세요,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지하철에서 일원역을 지날 쯤, 그럼 다음 역은 이원역인가, 하고 개그를 생각하다가 참고 나니 가수 김종환의 옛 노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멜로디를 빼고 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기야 노랫말은 시니까 상상을 통하여 그 감정을 이해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그 낭만적 현실은 만들기가 쉽지 않다. 나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르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잊은 지 오래다. 그런데 이제 다시 생각하니 그 말은 나는 대화가 절실히 필요해, 이 말인 것 같다. 홀로 자고, 깨어보니 아무도 말할 상대가 없다, 그래서 외로워.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상대가 있어 말을 해 보았자 밤사이 발효된 입 냄새 때문에 여러 말을 할 수도 없다. 우선 양치부터 하는 게 맞다.

 

현실적으로 내가 추천하고 싶은 대화는 ‘나 자신과의 대화, 좋은 책과의 대화’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정치인 중 머리가 꺼벙한 사람이 나오면 나는 큰 소리로 머리 좀 깎아라, 한다. 상대가 들을 리 없으니 반말을 해도 대들지 않는다. 그냥 맥없이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한다. 오늘은 어디로 나가 볼까, 어디가면 신기한 게 있지, 아,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카톡이 안 오면 혼자 큰 소리로 카톡, 카카톡 하기도 한다. 이렇게 저렇게 큰 소리를 내며 통기를 한다. 그러다가 책을 읽을 땐 낙서를 한다. 빨간 펜을 들고 교정을 보는 자세로 책을 읽는다. 그러면 더 이해가 잘 되는 것 같다. 내가 읽은 책에는 낙서가 많다. 저자가 보면 기분이 나쁠지 모르지만, 저자에게 보여줄 일은 없으니 걱정은 안 된다. 고서에도 소장자가 책의 상, 하 여백에 메모해 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대화 연습을 해왔다. 그런데 대화란 면대면의 직접적 대화만이 아니라 수많은 케이스의 대화가 있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지금은 90이 훨씬 넘으신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예전(1984년)에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는 주옥같은 수상집을 냈다.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영원히 대화를 즐기며, 사랑하며,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대화를 ‘대화님’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운 대화님, 사랑하는 대화님, 존경하는 대화님, 좋은 수식어를 다 가져다 붙이고 싶다. 이러한 대화의 기본기를 갖추면 인생이 즐겁고, 다른 인생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어쩜 이렇게 좋아지죠.”라는 광고 문구가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데 “어쩜 그렇게 젊어보이세요, 요즘 얼굴이 참 좋아지셨네요.” 이런 준비 자세로 상대를 보면 나도 그만큼 젊고 활기차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오버는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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