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으면 늙어지고, 늙으면 젊어진다.” 얼핏 보면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도 같지만 잘 보면 말이 된다. 우선 젊은이도 세월이 가면 점점 늙어가니 "젊으면 늙어진다.”는 말은 참말이다. 그러나 “늙으면 젊어진다.”는 말은 우주만물 영겁윤회의 사상기반에서 생각해야만 말이 된다. 젊으면 늙어지는 것은 눈에 띄는 경험세계이므로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나 “늙으면 젊어진다.”는 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세계이므로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우주만물의 진리를 판단하기 어렵다. 세상에는 드러나는 면의 이면에 더욱 크고 오묘한 우주운행의 원리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늙음의 젊음’은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원리에 의해서만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매우 형이상학적 ‘현상’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유의 가치는 우리 인간에게 과학이 제시할 수 없는 보다 크고 원대한 진리의 세계를 열어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사유의 중심에 불법(佛法)이 있다.
우리는 불교를 믿던 믿지 않던 불교의 원리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모두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생길에서 老 病 死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병 없이 항상 젊은 상태로 오래오래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의학, 물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 모든 과학이 행복한 인생을 위해 탐구되어왔다. 그러나 생로병사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한 물질과학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해도 누구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극복할 수 없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기쁜 일일지 모르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언제나 슬픈 일이다. 400만년의 인류사 전체가 모두 이 생로병사의 반복이 아니던가.
그러나 화계사 교양과정에 들어와 반야심경을 접하니 불교를 믿고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면 늙어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육신은 늙어도 정신은 조정하기에 따라서 젊음을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늙음의 젊음’이란 곧 우리의 정신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항상 새로워지고, 맑아지고, 자비로워지고, 넓어져서 저 광활한 지혜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에너지를 받은 상태라 생각된다.
유한한 인생길에서 육신은 찌그러지지만 마음의 에너지가 환희의 원력으로 넘치게 된다면 이게 진정한 젊음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러한 ‘늙음의 젊음’은 육체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쉽게 증득하기 어려우니 그들은 육신의 에너지만을 믿고 날마다 ‘늙음’을 재촉하며 몇 십 년을 허송하기 십상인 것 같다. 그러나 누구든지 부처님의 법으로 귀의하는 순간부터 젊은이는 육신의 젊음 위에 정신의 젊음을 새롭게 충전할 수 있으며, 늙은이는 새로운 정신의 젊은 에너지를 충전하게 되어 죽어도 인도환생을 하거나, 극락의 문을 노크하게 될 것이니 불교의 가르침은 참으로 위대하다.
흔히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공사상(空思想)을 피상적으로만 접하고는 허무주의(虛無主義)라거나 현세를 부정하는 염세주의(厭世主義)라고 오해를 한다. 필자도 역시 젊었을 때는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면 도대체 난 무엇인가?” 그러나 스님의 강의를 들으며 새겨보니 불교의 반야사상이 너무나 크고 원대하여 우주 만물 모두에 있는 지혜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 우주 만물에 깃들어 있는 정신은 항상 새롭고 젊어서 몇 억 만겁이 지나도록 항상 새로우니 어찌 젊음과 늙음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육신도 젊고 정신도 젊은 건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빛나는 업을 지을 수 있다. 열심히 일하여 선업을 쌓아 이생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육신은 젊으나 정신이 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별로 좋은 일을 못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가 힘들 것이다. 육신은 늙었어도 정신이 젊은 사람은 죽는 날까지 선업을 짓고 행복을 맛보다가 웃으면서 허울을 벗을 것이다. 육신과 정신이 다 함께 늙고 병든 사람은 마지막까지 물욕에 탐닉하다 공포에 떨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과연 어느 스타일이 행복한가. 그래서 필자는 화계사에서 불법을 배우게 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 육신이 죽는 날까지 ‘젊음의 정신’으로 열심히 행복하게 살다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이 허울을 벗고 반야의 세계로 입문하고 싶은 것이다.(2008.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