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무언, 무구유언
유구무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유구무언[有口無言] :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변명할 말이 없음을 이르는 말”, 이렇게 나오네요. 일종의 상황 언어라고 할까요. 입에 언어기능은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는 할 말이 없다는 뜻이네요. 그 상황은 여러 경우가 있겠지요. 예를 들어 동일본 지진 쓰나미를 목격했을 때 사람들은 말문이 막혔을 겁니다. 또 소소한 일상적 상황에서도 뭔가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변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테고요.
무구유언(無口有言)은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그냥 제가 재미 삼아 상상해본 조어입니다. 한문 문자의 의미로 보면 입은 없어도 말은 있다, 는 뜻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이 말이 유언(遺言)의 뜻과 같다고 생각해본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어떤 유튜브를 보다가 유언은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 써 놓으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죽음에 임하여 혼미한 상태에서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고, 또 죽으면 입까지 사라져버려 유언을 남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언을 남기려면 미리미리 초안을 잡고 검토하여 수정, 수정하여 나름 맘에 드는 글을 남기는 게 최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문득 무구유언에 해당하는 가장 좋은 사례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고전은 옛사람들이 남긴 소중한 유언이라는 거죠. 노자의 책은 노자의 유언이요, 공자의 책은 공자의 유언이요, 세종의 책은 세종의 유언이요, 정약용의 책은 정약용의 유언이요, 등등 말이죠. 그분들의 생물적 입은 다 사라졌지만, 그분들이 남긴 책들은 영원히 살아남아 오늘을 사는 우리를 계속 일깨워주고 있거든요. 현재 살아 있는 저자의 책도 언젠가 저자들이 떠나면 그들의 유언이 될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글을 쓰고 글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글을 쓰면 자녀들이 어떤 게 진짜 유언인지 알기 어려울 것이니 계속 글을 쓰더라도 생각을 잘 가다듬어 A4 용지 한 장 정도의 요약판 유언을 남길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문서는 반드시 손글씨로 쓰고, 약간의 그림도 그려 놓으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유언은 진솔한 책이라고 생각되므로 날마다 삶의 희망을 주는 글을 계속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상 저의 ‘유언학’ 오리엔테이션이었습니다. 시험지 채점하다가 지루해서 그랬어요. 2020.7.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