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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수필

수필과 나

수필과 나

이번 2019 수필 예술편집진이 정해주신 글 제목입니다. 무엇을 의도적으로 쓴다는 것은 너에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마음에 들어오는 감정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너의 글쓰기 습성인데, 이렇게 글 제목을 받으니 마치 논술 답안을 쓰는 것처럼 약간 긴장됩니다. 하하. 긴장되면 크게 한번 웃어야지요, .

네가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아마 1958년 초등학교 1학년 때인 것 같습니다. 정말 순진무구한 시절, 그때 한글을 배우면서부터 숙제로 일기를 썼지요. 정말 유치찬란한 여덟 살, 점점 세상이 신기하게 다가왔지요. 중학생 때는 제법 어른스럽게, 부모님 돈 걱정을 했습니다. 월사금을 못 내 자퇴를 생각했습니다. 엄마가 자퇴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셔서 할 수 없이 버텼지만요. 그리고 너의 일기는 간헐적이나마 계속되었습니다.

3 때 아버지가 떠나셨습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어머님이여!” 시골뜨기 17, 청춘, 슬픔, 사랑, 학문, 직업... 삶의 파도가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너는 한 가닥 햇살을 보았습니다. 너는 아마 느린 열정을 가졌나 봅니다. 세상을 천천히 그리고 착하게 대하니 세상도 천천히 그리고 착하게 반응했습니다. 간혹 예외는 많았지만요. 네 간혹 많았어요. 하하.

은퇴 후 너는 네가 만나는 신기한 세상을 더 열심히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S대 평교원 글쓰기 수업에서 교수님으로부터 자서전을 써보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럴만한 업적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을 자랑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너의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써온 일기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너에게 일기는 솔직, 담박, 희망, 사랑, 자비, 뭐 이런 것일까요? 그래서 수필가라는 소린 못 들어도, 잘 쓴다는 소린 못 들어도 하루하루 삶의 기쁨을 그려봅니다.

언제부턴가 너는 글을 쓸 때 나를 너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기보다 나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져보려고요, 하하. 그래도 내가 네가 되는 건 아니지만, 또 다른 내가 또 다른 나를 보는 것은 좀 더 객관의 시점(point of view)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는 오늘도 학교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1시부터 5시까지 일본학을 공부했습니다. 나의 수필은 너의 일기입니다. 201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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