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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컬럼/컬럼

철도 인문학 방법론

  시민들은 시내로 외출할 경우 주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선 전철과 버스는 막힐 염려가 없어 시간약속을 잘 지킬 수 있다. 주차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고 들을 수 있어 지금 내가 인간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도 갖는다. ‘불우한 이웃들에게 단돈 천원이라도 도와주었는지.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했는지, 남에게 피해가 되지는 않았는지’ 등을 생각하고 반성도 하게 되는 것이다.

  또 더욱 좋은 것은 운전에 신경 쓰지 않고, 졸음이 올 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집에서는 책을 잘 읽지 않다가도 지하철에서 책을 보면 ‘감독하는 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더 잘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시내에 갈 일이 있으면 우선 읽을 만한 책 한 두 권과 형광펜을 챙긴다. 이 책이 지루하면 저 책을 읽고, 이 책 저 책 읽으면서 와 닿는 부분이 있으면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두었다가 집에 와서 그 부분을 다시 보기위해서이다.

  오늘은 전철에서 책을 읽다가 문득 몇 년 전 서울 지하철 4호선에서 책 열차를 운행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열차의 이름은 ‘메트로북멧세’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출판계에서 열차 선반에 책꽂이와 책을 비치하고 시민들이 책을 볼 수 있도록 좋은 기획을 한 것이다. 필자는 그 열차를 타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과연 문화시민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메트로북멧세’는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이 너도 나도 책을 가져가는 바람에 책 보충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 그 일을 잘 생각해보니 ‘책 열차’의 아이디어는 참 기발했는데, 치밀한 경영계획 없이 성급하게 책부터 놓아둔 것이 실패의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책이란 하나의 상품이어서 새 책을 그냥 열차에 놓아두면 책을 안 읽는 사람도 탐을 내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손녀 줄려고, 아저씨 아줌마는 자식, 형제, 자매 등등....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고, 효과적인 이용 시스템도 없고, 오로지 ‘시민의 양심’만을 믿고 일을 시작했으니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도 방법이 서툴면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 같다. 그러나 그 후 보완된 후속 조치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으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정말 지하철 문고의 운영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오늘 책을 읽는 대신 일종의 공상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가는 곳 마다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는 평소부터의 내 생각과 ‘메트로북멧세’의 사례를 연결하여 새로운 ‘철도도서관’ 제도를 그려보았다. 그 구상은 대체로 이러하다.

  먼저 철도청에서 철도도서관을 경영한다. 서울역쯤에 철도도서관 본부를 두고 전국 역에 지부를 둔다. 승객들은 서울역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아 목적지까지 가면서 읽다가 종착역에 내려 차표와 함께 반납한다. 이렇게 유통되는 책들은 일정 기간마다 제자리를 찾아준다. 장기 대출을 원하는 국민에게는 회원증을 만들어주고 기간을 정해 대출 할 수도 있다. 주요 역의 도서관마다 사서를 배치하고, 개찰구에 센서 하나씩을 추가하면 되므로 사업전체 예산에 비해 그리 큰 비용이 들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철도청은 국민고객들에게 인문학 환경을 제공하고 품위 있는 ‘홍보’도 할 수 있어 철도사업 활성화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둘째, 대도시의 지하철공사는 철도도서관의 서브시스템으로서 ‘지하철 도서관’을 만들고 역마다 간이 문고를 둔다. 지금처럼 보지도 않는 허름한 책 몇 권을 관리자도 없이 방치해 둘 것이 아니라 역마다 신간서적들을 비치하고 공익요원이나 퇴임 후 일을 찾으시는 어르신들에게 간단한 관리교육을 하여 각 역의 문고에 근무하게 한다. 그리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에게는 누구나 원할 경우 지하철도서관 회원권을 내어준다. 시민들은 승차 역 문고에 들러 책을 대출받아 지하철에서 이용하고, 도착역에 가서 반납하든지, 좀 장기 대출하고 싶으면 대출 기간 동안 집에서 이용하다가 가까운 역에 가서 반납한다. 회원으로 관리하므로 반납이 지연되면 이메일 또는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독촉할 수 있다. 시민들이 집에서 안 보는 책은 가까운 역에 기증할 수도 있다.

  모든 시민들에게 오며 가며 짜투리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마련해준다면 공익사업인 철도사업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고, 철도사업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달라져서 많은 국민들이 철도와 그 도서관을 애용할 것이며, 나아가 국민 전체의 문화수준도 함께 향상되는 ‘쓰리 윈(3 win)'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고 본다.   

  한 가지 강조할 일은 책이 있는 곳에는 항상 사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지키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책을 잘 안내하여 시민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책을 읽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서 없이 시도한 1960년대 ‘마을문고’들은 모두가 흐지부지 사라졌다. 지금 ‘작은 도서관’을 한다고들 의욕적으로 논의하고 있으나 아무리 작은 도서관이라도 사서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 최적 모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철도도서관이든, 문고든, 작은 도서관이든, 큰 도서관이든, 도서관은 책이 있어 저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능한 사서의 ‘열정’에 의해서 ‘경영’된다는 사실을 세계도서관의 역사는 웅변하고 있다. 우리는 그 ‘역사의 웅변’을 ‘경청’해야 한다.(200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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