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에 이사 온 이후 가끔 인근의 여러 마을들을 둘러보곤 한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이 파주 예술마을 ‘헤이리’와 자유로 휴게소에 붙어 있는 ‘출판단지’이다. ‘헤이리’는 각종 전시관과 문화적 볼거리가 많아서 좋고, 출판단지는 볼거리는 없지만 책이 탄생되는 마을이라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하다. “아, 이곳에 이렇게 많은 출판사들이 있어 날마다 좋은 책이 탄생 되구나.”
그런데 이곳을 지날 때마다 나도 책을 좀 낳고 싶은데 어디가면 내 원고를 받아줄까 하고 고민을 한다. 이번 방학에도 작은 책 한권 분량의 원고를 어제 막 탈고했는데 어떤 ‘산부인과’로 가야만 내 책을 예쁘게 받아 줄 것인가? 그래서 한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출판 상담을 하고자 방문하고 싶다고 했더니 언제든 오시라는 답변이 들려왔다. 그래서 내친김에 눈이 내리는 자유로를 따라 그곳에 갔다.
사실 나는 출판사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신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경험한 한 가지 에피소드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 어느 유명 출판사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다. 그래서 정식으로 출판계약을 하고 방학 내내 원고를 작성하여 출판사가 원하는 날짜에 송고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문의했더니 함께 시리즈로 기획한 다른 저자분의 원고가 늦어져서 보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긍이 갔다. 그리고 또 기다리고, 또 문의하고, 또 기다리기를 1년 반, 소식이 없었다. 계약이 일방적으로 무시된 것이다.
그래도 책은 출판사에서 만들기에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때의 경험에 비추어 큰 기대는 못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출판사도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약속한 출판사에 들어가 상담을 했다. 출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담당직원의 표정에서 약간의 부정적 단서가 감지되었다. 원고를 훑어보지도 않고 여러 조건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역시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편집 인쇄하는 곳이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친절하게 인쇄소 영업팀으로 안내해 주었다.
나는 원고를 들고 인쇄제작비용을 상담했다. 자비로 몇 십 부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나누어줄 생각에서이다. 의외로 인쇄비는 많이 들지 않았다. 편집만 잘하면 인쇄만하는 것은 그리 큰 부담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편집에 대하여 여기저기 전화로 알아보고 견적을 기다리는데 마침 한 편집기획사에서 신속하게 견적서를 보내왔다. 그런데 ‘배보다 배꼽이 큰 금액’이었다. 원고파일을 맥컴퓨터 글자로 전환하는데 그렇게나 수고비가 많이 들다니? 맥컴을 한대 사는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사람이 유명하지 않으니 책을 하나 내기도 이렇게 어렵다. 유명한 아나운서나 문필가의 글이라면 이렇게 푸대접 받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상업성이 없다고 생각하면 외면당하는 풍토가 출판계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출판사들은 글의 내용보다는 사람의 유명세를 우선 고려한다는 사실을, 출판계를 통해서는 인기 적은 분야의 학술발전이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어제와 오늘이다.(2008.1.22)
'수필/컬럼 > 컬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어정신과 '로스쿨' (0) | 2008.02.06 |
---|---|
철도 인문학 방법론 (1) | 2008.01.27 |
도서관의 '삼필정책' (0) | 2008.01.16 |
책과 기록, 그리고 역사 (0) | 2008.01.12 |
번역과 학문 (0) | 2008.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