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말이다. 집집마다 학생이 없는 집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학생이 이들 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길가는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가 학생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살이에는 누구든 항상 무언가 배움을 요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라고 안 배울 수 없다. 노인대학에 가서 노후를 보람 있게 정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장이라고, 대통령이라고 안 배울 수 없다. 사장은 회사의 경영을 위해서, 대통령은 국가경영을 위해서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교수라고 안 배울 수 없다. 새로운 학문을 위해서, 후진 양성을 위해서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사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계속 배워왔다. 말을 배우고 먹는 것을 배우고, 숟가락 젓가락질을 배우고, 글자를 배우고, 산수를 배우고, 과학을 배우고, 기술을 배우고, 요리를 배우고, 운전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윤리를 배우고, 철학을 배우고, ... 이러한 배움은 계속 전개되어 왔고,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다. 개인에 따라 보다 효율적으로 배우느냐 아니냐의 정도 차이는 있다. 효율, 효과적으로 배우는 사람은 앞서나가며 선두그룹이 된다. 지지부진하게 비효율적으로 배우는 사람은 꼴지 그룹으로 처지게 된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성인들은 평소 본인이 학생이라고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에서 뭘 좀 배워보라고 권유해도 “이 나이에 내가 그거 배워서 뭐하게. 그냥 편히 살래” 하면서 거부할 것이다.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연세 드신 초로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컴퓨터 인터넷을 안 배우는 것을 오히려 자랑삼아 내세우기도 한다. 일종의 옹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인간이 평생 배워야 산다는 것은 어제 오늘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유네스코에서 평생교육의 개념이 정립된 것은 1960년대 초라고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사람은 평생학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필자는 그 결정적 증거를 제사 지낼 때 써 붙이는 위패에서 찾는다. 제사 때 어느 집이나 제주에게 부친이 되는 어른의 위패는 “현고학생부군 신위(顯考學生府君 神位)”라고 쓰는 것이다. ‘학생부에 속하는 어른의 신(神)이 위치하는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부친은 돌아가셨어도 입법, 사법, 행정부(行政府)가 아닌 ‘학생부(學生府)’에 속하는 것이다. 장관이나 벼슬아치, 또는 박사급 학자가 돌아기면 위패에 그 직책이나 학위를 쓰기도 하나 이는 한낱 거드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들도 평생 배워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고칠 것이 있다면 어머니, 할머니의 위패를 성씨만을 넣어 ‘OO씨 신위’라고 쓰는 것이다. 이는 양성 평등에 위배된다. 따라서 모계 계통의 위패도 앞으로는 ‘OO학생부여사(OO學生府 女史) 신위’ 정도로 써야하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 인간은 평생 배워야 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기왕 배울 거 망설이지 말고 여건을 만들어가며 부지런히 배워야 하겠다. 이르고 늦고를 따질 것 없이 스스로 배우고 싶은 것을 열심히 배우면 되지 않을까? 오늘도 내일도 배우러 가자.(2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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