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의 향기
너는 오늘도 서울을 여행했다. 우선 네가 간 곳은 전철 7호선 내방역이다. 일주일 전에 일산에 계시는 고향 선형(先兄) 이 박사님과 합동으로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오랫동안 후학을 가르치시던 권 교수님을 뵙고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전철 노선도를 찾아보니 내방역은 고속터미널역 다음에 붙어있었다. 내방역이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내방, 너의 입장에서 보면 탐방, 하하. 내방의 한자(漢字)를 확인해 보니 內方, 그 내방(來訪)이 아니다. 너의 생각과는 다른 뜻. 네가 사는 문정 로데오에서는 461번 버스로 수서역, 수서역에서 고속터미널역, 고속터미널역에서 내방역, 이렇게 가면 되겠다. 소요시간은 넉넉잡고 약 1시간. 약속시간에 맞추려면 30분 정도 여유시간을 배정해 두는 게 좋다. 그래서 너는 10시 30분에 문정 로데오거리를 나섰다.
차에서 메모를 좀 하다 보니, 예상대로 오전 11시 30분 내방역에 도착했다. 약속시간 12시까지 30분의 여유가 있다. 너는 전철 역사 안에서 이리 저리 서성이며, 스마트폰으로 너의 홈페이지를 살펴보며, 이 박사님을 기다렸다. 일산이라 멀어서 그런지 이 박사님은 12시가 좀 넘어서야 개찰구로 나오셨다. 황금색 보자기에 싼 배 한 상자를 왼 손에 들고 기우뚱 불균형한 자세로 등장, 하하. 형님은 아직도 예전 이웃사촌 시절의 인정을 간직하고 계시나보다. 너는 빈손으로 탈래탈래 왔는데. 너는 이 박사님과 배상자 보자기를 맞잡고 보폭의 보조를 맞추며 권 교수님댁으로 향했다. 어느 새 길가에 권 교수님이 마중 나와 손을 들어 보이신다. 이 박사님과 너는 권 교수님 댁에 들어가자마자 사모님께서 차려놓은 한과를 안주삼아 새콤달콤한 모과차를 마셨다. 그런데 권 교수와 이 박사 그 두 분이 만나니 10살 정도 연하인 너는 그 분들의 이야기에 끼어들 틈새도 화두도 없었다. 너는 자동으로 침묵하는 청자가 되어 두 분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일제 강점기 너의 아버지 세대 그 때 그 시절을 상상해 보았다. 한복을 입은 조선의 지식인들, 하하. 고생스러웠어도 추억은 아름다워. 하하.
13시 20분, 이윽고 권 교수님이 점심을 사시겠다며 나가자고 했다. 그래서 아무런 선택지도 없는 너는 이 박사님과 함께 묵묵히 따라 나가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둔 권 교수님의 창세기(GENESIS)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차를 타고 한 500미터 쯤 갔을까? 식당이라 하여 내리니 함흥 냉면집이다. 너는 식사메뉴 선택권이 없어 또 잠자코 있었다. 무엇이든 그 선배님들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오늘 너의 의무와 미덕이다. 아무 소리 말고 잠자코 기다리는 것이 오늘 너의 최선의 정책이다. 눈치 9단인 너는 아무 불만이 없다. 당연히 비싼 음식을 주문하실 것이다. 하하. 권 교수님은 우선 갈비를 시키고, 그 후식으로 비빔냉면을 시키고, 또 먹다 남은 갈비찜 양념에다 밥을 비벼 달라고 주문을 하고. 그야말로 함포고복은 이럴 때 사용하는 전문용어다. 내 배는 부른다, 내 배는 부른다, 산타루치야, 산타루치야, 너는 변종 가곡을 부르고 싶은 작은 충동을 느꼈다.
밖에서 점심을 얻어먹었으면 손님은 잘 먹었습니다, 교수님, 다음엔 저희들이 식사를 대접할 기회를 주십시오, 저희들은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헤어지는 게 일반상식인데, 권 교수님은 또 두 이 박사를 집으로 유인했다. 보여줄 게 있다는 것이다. 권 교수님은 이제 명예교수라 책을 많이 처분해버렸다는데도 아직 여기 저기 책들이 무질서하게 널려있다. 가보처럼 간직해온 고문서와 고서도 여러 상자, 교수님은 예전의 사진과 편지글까지 보여주시며 설명하기에 바쁘다. 평생 대학에서 살면서 선대의 기록과 정신문화를 이어온 학자, 역사의 지향과 묵향이 집안 곳곳에 배여 있다. 사모님은 서예의 대가였다. 금강반야바라밀경, 천자문, 신천자문, 사자소학 등을 붓글씨로 정성스럽게 써서 마치 고서처럼 황지홍사(黃紙紅絲) 책으로 묶어 놓았다. 세상의 유일 필사본이다. 식탁 옆에는 책처럼 넘겨볼 수 있게 제본한 사모님의 친필 족자도 걸려있다. 너는 와!, 와!, 와!, 하며 연신 감탄사를 남발했다. 어쩜 이렇게 정신이 멋지고 향기로울까. 이들 작품, 고문서, 책들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개인도서관을 설립하면 좋겠다, 순간 사서의 근성이 발동했다. 권 교수님도 이 문서들의 처분을 고민하고 계신 듯, 아들에게 물려줄까 어떻게 할까를 생각중인데, 일단은 보존을 위해서 고문서에 배접을 해두면 어떨지 너에게 의견을 물었다. 너는 배접은 오히려 원본 보존을 훼손할 것이라는 임시 의견을 내고 앞으로 고문서 전문가에게 알아보겠다면서 일단 결론을 유보했다. 도서관을 만들자는 건의는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생각 같아서는 대대로 이어갈 불교문화도서관을 설립하면 참 좋을 텐데, 황순원 문학관, 이효석 문학관, 간송미술관 등의 문화박물관을 겸하면서도 불교평생교육에 지속적으로 기여하는 도서관으로 만들면 참 좋을 텐데, 가정법만이 뇌리에서 종횡무진 돌아다닌다.
그런데 고문서 보여주기를 마무리한 권 교수님은 다시 식탁의자에 앉아 불교에 대한 본인의 소신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불교의 정신, 불교의 체계,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행과 기도의 모순 등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예를 들어가며 한 30분 동안 열띤 강의를 하신다. 누가 물어봤나? 하하, 교수들은 대화 그 자체가 강의가 되기 쉽다. 어떨 땐 듣는 사람이 혼나는 느낌? 그런데 생각해보니 너도 그렇다. 아들며느리가 한 달에 한번 정도 너에게 밥을 사주로 올 때 네가 하는 이야기도 강의처럼 들린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오늘 권 교수님의 말을 들으니 너도 정말 그런가보다. 오죽하면 불교에서는 교수아사리라 할까? 아사리 판에서처럼 말이 많은 게 교수라고. 그래그래, 인정해. 오늘 권 교수님이 그런 사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셨잖아, 너도 마찬가지라고, 오늘은 듣는 입장이라 열심히 듣고 있었지만 말하는 입장이 되면 너도 한 강좌 할 수 있지, 하하. 그런데 오늘 권 교수님의 강의는 너무 귀에 쏙쏙 들여왔어. 마치 네가 혼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불교계를 혼낸 거지. 하하. 너도 강의에서 종종 너의 전공계통을 혼내는 것처럼. 하하. 그런데 조심은 해야 한다. 권 교수님은 직접 담그셨다면서 복분자술을 한잔씩 따라주셨다. 오, 색깔 좋고 달콤한 산딸기 술, 옛날 청소년 시절 산에 살 때 말하자면 채집경제시대에 따먹던 그 산딸기가 생각난다. 너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권 교수님댁을 나올 수 있었다. 너에게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하셨다. 서지학을 했으니 물어볼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하하. 네가 명함을 드리자, 교수님도 명함을 주셨다. 그러면서 명예교수도 재직자로 분류된다며 파안대소, 동구 밖까지 너희 둘을 배웅해주셨다.2016. 9. 24(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