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8일 규장각을 다시 보기 위해 창덕궁을 찾았다. 비가 내린 뒤라 숲 공기가 한결 상쾌했다. 후원을 거닐면서 삼림욕을 하는 기분...
창덕궁 안내문
창덕궁昌德宮 Changdoekgung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은 1405년에 제2의 왕궁으로 창덕궁昌德宮을 창건했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 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270여 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왕조 제1의 정궁으로 역할 하였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동쪽의 창경궁昌慶宮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궐東闕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궁궐 예제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景福宮 역시 이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은 인위적인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환경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다. 왕실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공간구성은 경희궁, 덕수궁 등 다른 궁궐 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7년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들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옮겨짓는 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되었다. 1991년부터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은 조선궁궐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으며, 동궐의 후원은 한국전통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예로 평가된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옛 규장각은 창덕궁 후원에 있으며 건물의 현판은 주합루로 되어있다.
어수문과 주합루 안내문
주합루(宙合樓)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의 누각 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 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 작은 어수문(魚水門)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철학을 보여준다.
규장각을 지나 조금 넘어가면 사대부의 집으로 지어진 연경당이 있고 같은 울타리 안에 선향재가 있다. 다음은 창덕궁 후원 연경당의 선향재 마루에 있는 선향재 안내문이다.
선향재 善香齋
선향재는 서책을 보관하고 책을 읽으며 또 손님도 맞이할 수 있는 집이었다. “선향재장서처 善香齋藏書處” 라는 글이 궁궐지宮闕誌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연경당演慶堂의 서재로 지어진 집입을 알 수 있다. 집의 구조는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온마루를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두었다. 이 집의 서쪽에는 차양遮陽을 달았는데 예부터 사대부집에 만들어져 따가운 석양볕이나 비바람을 피하던 구조이다. 선향재의 동쪽 언덕에는 돌을 층층이 쌓아 화계를 만들어 꽃과 나무를 심어놓고 보며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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