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하루는 작은 용기를 내었다. ‘거사회’ 방으로 들어가 회원가입을 한 것이다. 연세 드신 할아버지 몇 분, 정년퇴직을 하신 것 같은 아저씨 몇 분이 웃으시며 환영해 주셨다. 내친김에 ‘법보’에 대하여 여쭈어보았다. 원고를 하나 내고 싶은 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그랬더니 회장님께서 “인터넷으로 보내면 되요.”하신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그렇지만 법보에 원고를 보내는 방법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래서 다음번 절에 갔을 때는 법보 편집자를 직접 만나볼 생각으로 담당보살님이 계신 방위치를 물어 찾아갔다. 그랬더니 반가워하며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신다. 나와 법보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조금씩 절을 알게 되어가도 주지스님이 누구신지, 어느 스님들이 계시는지 물어보지 못하고, 소개 받지도 못하고, 그저 승복 입고 다니시는 스님들께 합장 인사만 드릴 뿐이다. 절이건 속가이건 방문하면 먼저 주인부터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한데, 이거하나 실천 못하니 그래서 ‘우매한 중생’이라는 소리를 듣는가 보다. 그래 결심을 한다. 다음 번 절에 갈 때는 꼭 주지스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절에 가서 절하고 공부하면서 내 마음 속엔 또 하나의 ‘엉뚱한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의 전공과 절을 좀 돈독하게 인연 맺어 여생을 보람 있게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이다. 하루는 집을 나서 출입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를 누르고는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시간동안 대문을 바라보니 대문 중간에 세로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광고물 스카치테이프 본드 흔적이 군데군데 얼룩져 보기 싫게 느껴졌다. “저 자리에 좀 예쁜 종이를 갖다 붙여볼까. 그런데 그냥 종이만 붙이면 의미가 없으니 의미 있는 글자를 몇 개 써 붙이면 어떨까. 집에 책이 많으니 ‘이종권도서관’이라고 붙여볼까. 그러나 아파트에 도서관이라고 붙이는 것도 좀 그러잖아. 그럼 절에 다니니 도서관도 절도 아닌 ‘도서관사(圖書館寺)’라고 붙여볼까.” 상상이 날개를 달고 종횡으로 날아다녔다.
그런데 그 다음에 생각해도, 또 그다음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도서관사’가 제법 마음에 든다. “도서관을 차려놓은 절도 좀 있어야지, 절에 가면 책도 볼 수 있고, 학승을 만나 대화도 할 수 있어야지”, 혼자 논리를 세워보며, 내가 정말 프리랜서교수에서 은퇴하면 이 아이디어를 꼭 한번, 어떤 방법으로든 실현해 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전공은 못 속인다’고,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무엇이든 스스로 좋으면 실천하는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이 절이 좋으면 절로가고, 도서관이 좋으면 도서관으로 가고, 둘 다 좋으면 ‘도서관사’를 여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그때 나는 아마 ‘도서관사(圖書館寺)’의 ‘주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스님이 아니니 주지스님은 못되고, 그냥 ‘주지’라고만 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도서관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니 ‘주지교수’로 불러 주면 더없이 좋을 거고... 다음번 주지스님을 만나 신행상담을 할 기회가 온다면 이 문제도 좀 상의해 보아야 하겠다. 혼자만의 생각은 항상 허점이 있는 것이니(2008.1.17).
'수필/컬럼 >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름 (0) | 2008.01.17 |
---|---|
무자년 마우스 (0) | 2008.01.17 |
마음에 피는 연꽃 (0) | 2008.01.17 |
사람이 책이고, 책이 사람이다 (0) | 2008.01.17 |
알고 보면 시시해? (0) | 2008.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