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의 이목구비
불가에서는 안이비설신, 즉 오감의 피해를 욕심과 엮어 자주 거론한다. 그런데 사실 오감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아니 사람이라도 불편한 사람이지. 오감은 인간이 세상과 소통하는 아주 좋은 창구인데 불가에서 피해만 이야기 하면 모순 아닌가. 그래서 오감은 일단 좋은 것으로 간주하고 오감의 피해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설법의 순서가 아닐까 싶다.
우선 불상의 이목구비를 보면 어떤 불상을 보더라도 잘 생기게 조각을 했다. 눈은 인자하고, 콧대는 높고, 살며시 염화미소를 띤 입술에, 그리고 세상의 소리를 다 빨아들일 것 같은 커다란 귀 바퀴, 인물이 저 멋진 불상을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인물이 저래 좋으니 여성 불자님들이 고운 한복을 입고 따르는 것일까? 하하. 아니 이건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원래 석가모니는 인도사람이므로 인도인의 이목구비를 구비하고 계셨을 것 같다. 간다라 미술을 보나 지금의 인도인들을 보나 하나 같이 이목구비가 준수하다. 특히 동아시아인에 비해 아리아인들은 코가 높다. 아마 들창코는 없는 듯, 하하. 요즘은 사진을 찍을 때 얼굴을 쳐들고 찍는 것 보다는 약간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찍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찍으면 코의 윤곽이 살고 들창코는 숨는다. 하하. 그런 사진 많이 보았지. 셀프 카메라 봉을 올려 들고 찍으면 대개 사람들의 인물이 좋게 나온다. 하하. 그래서 너도 그 방법을 따라해 볼까 생각 중이다.
그런데 그 반듯한 인물을 가지고 마음을 바르게 쓰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 특히 준수한 인물과 육체의 에너지만을 믿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들먹거리다가는 생의 의미와 보람을 놓치기 쉽다. 어려서부터 인문학을 실천해야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생각하고, 반성하고, 세상과의 관계를 건전하게 맺어 모든 생명을 도와주는 자세를 갖추는 것, 그것이 인문학이 아닌가 싶다.
오늘 책방에 나가 책을 두 권 샀다. 『명리 인문학』 그리고 『인문학의 재발견』. 설을 핑계대고 설에 읽어보려고 산 것이다. 그리고 문정인문학도서관에서 <인문학의 즐거움>을 강의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고 샀다. 날마다 삶을 반성하며 내일의 보람을 위해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사는 것, 느리고 답답하지만 이게 인문적 삶의 정석이란다. 수학의 정석은 몰라도 삶의 정석은 알아야 하나보다. 하하. 2017. 1. 27(금).